[문학예술]꽃 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서

  • 입력 2005년 11월 2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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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서/오세영 지음/128쪽·7000원·고요아침

오세영(62·사진) 시인은 우리 시단의 대표적 중진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이번 시집은 ‘우리말로 만든 화원(花園)’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앞뜰이나 뒤란, 벌판이나 산정 같은 강산의 이곳저곳에 피어있는 우리 꽃들을 노래한 버라이어티쇼, 혹은 꽃들의 ‘만인보(萬人譜)’라 할 만하다. 우리가 한번쯤 봤음직한 예순 세 가지 꽃들 하나하나마다 성격이나 이야기를 불어넣어 만든 시집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을 읽다 보면 책갈피마다 사진처럼 선명하게 피어오른 꽃들의 이미지가 포토샵 처리를 거친 것처럼 생생하게 콜라주된다.

‘벌도 나비도 얼씬대지 못한다./위엄 가득한 근위병’(오동꽃) ‘다리에서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가슴으로 칭칭/감아 올라/마침내/낼룽거리는 네 혀’(능소화) ‘차창 안에서/적막하게 손을 흔드는 소녀의 희미한/실루엣’(코스모스) ‘지상으로 팽개친 직녀의 하얀 백금 브로치’(조팝꽃) ‘초연 가신 광장의 깃발들처럼/울타리 가득 뻗어 올라 빛을 향해서/만세!’(나팔꽃)

아름다움과 슬픔, 관능과 우수를 한 몸에 가진 것이 꽃 말고 뭐가 있으랴. 시인은 무엇보다 꽃을 여인으로 보고 있다. 그럴 때 그 꽃은 옛 사랑이나 아내, 소녀이기도 하고, 불쑥 떠오르는 요염한 얼굴이기도 하다.

‘얼떨결에 입술을 도둑맞고/무안해서 숲 속으로 달아나 숨는 소녀의 아른거리는/하이얀/원피스//첫 키스의 그/알싸한 향기’(‘치자꽃’)

문득 마주친 꽃 속에서 어머니가 보일 때 시가 어느 때보다 절절해진다.

‘아버지는 일찍이 세상을 떴다./물 건너 외지로/산 너머 대처로/성장한 딸마저 하나씩 차례차례 여의고 홀로/고향의 빈집을 지키는/어머니/그 숱 많고 쪽진 머리가 이제는 하얗게 세어/잔바람에도/가볍게 날린다./집 앞 전신주는 바람에 잉잉 우는데/우체부는 이미 발길을 끊은 지/오래.’(‘민들레’)

오세영 시인은 얼마나 꽃을 좋아하는지 가끔씩 나비나 벌의 눈이 되어 꽃밭 위를 나지막하게 날아보기도 한다. 시 ‘유채꽃’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봄 들녘에/무리지어 핀 노오란 유채꽃들은/지상으로 떠내려 온 한 떼의/구름,/하늘을 날고 싶은 자들은 저마다 그 속으로/풀쩍 뛰어든다.’

시인은 꽃봉오리만큼, 꽃그늘도 유심히 바라본다. 정원의 화려하고 우아한 붉은 꽃들만큼, 골짜기에 깊이 파묻힌 연보랏빛 꽃들도 유심히 바라본다.

‘지상에 떨어진 별들은 모두/어디 갔을까./더러는 불 타 허공에 사라지고 더러는/죽어 운석으로 묻히지만/나는 안다./어디엔가 살아 있는 별들도 있다는 것을,/깊은 산속/구름 호젓하게 머물다간 자리에 아아,/날개 상해 떨어진 별들이/한 무더기 도라지꽃으로 피어 있구나.’

오세영 시인이 눈 덮인 산비탈에서 쓴 이 시집의 서시 ‘설화(雪花)’를 보면 그가 꽃들을 통해 쓰고자 하는 것은 결국 사람임을 알게 한다.

‘꽃나무만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은/겨울의 마른 나뭇가지에 핀 설화를 보면/안다./누구나 한 생애를 건너/뜨거운 피를 맑게 승화시키면 마침내/꽃이 되는 법,’….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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