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경영]글로벌 경제의 위기와 미국

  • 입력 2005년 11월 2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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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제의 위기와 미국/로버트 루빈, 제이콥 와이스버그 지음·신영섭 김선구 옮김/566쪽·2만4000원·지식의 날개

대학수학능력시험 뒤끝이니 입시 이야기부터 해 보자. 한 대학 졸업생이 미국 프린스턴대 입학처장에게 빈정대는 편지를 썼다. “당신들이 나의 입학을 거절했지만 나는 하버드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다.”

처장은 답장을 썼다. “우리는 매년 몇몇 우수한 학생의 입학을 거절해서 하버드대 같은 곳에도 보내 주는 것이 우리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버드, 프린스턴은 세계 1위를 다투는 대학이다. 이 일화는 미국 대학들의 신입생 선발 기준이 제각각이라는 증거로 미국 학부모들이 자주 입에 올린다.

이 졸업생이 로버트 루빈이다.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의 공동회장, 미국 재무장관을 지냈고 현재 세계 최대의 금융그룹인 씨티그룹 공동의장 자리에 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관련해 루빈 재무장관,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래리 서머스 부장관(현재 하버드대 총장)을 ‘세상을 구한 위원회’ 멤버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루빈이 월가(街)와 워싱턴에서의 경험담을 엮은 ‘In An Uncertain World’(2003년)가 번역 출판됐다.

우선 루빈의 성공 요인이 궁금하다. 그는 빈털터리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의 손자다. 공립학교 출신으로 주눅이 든 그는 하버드에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꽉 짜인 하루하루를 살았다. 하버드에서 그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였다.

고향인 뉴욕의 법률회사를 거쳐 골드만삭스로 옮긴 그는 같은 상품이 국제시장에서 가격차를 보이는 것을 활용해 돈을 버는 재정(裁定)거래를 담당한다. 루빈의 주특기는 여러 가능성을 확률로 계산해 미래의 손익을 추정해 보는 것이었다.

위험성이 크지만 수익이 높은 거래로 돈을 많이 벌어 준 그는 만 32세인 1971년 초 이 회사 파트너가 된다. 월가에선 파트너가 되는 것이 성공의 첫 단계다. 그는 10년 후 경영위원회 멤버가 됐고 또 10년 후엔 공동회장까지 올라갔다.

그는 정계에서 뛰고 싶어 했다. 미국엔 한국과 같은 영입은 거의 없다. 아래서부터 뛰거나 당에 선거자금 등으로 기여해야 한다. 루빈은 선거자금 후원 방식을 택했다.

민주당에서 아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던 1991년 어느 날 루빈은 빌 클린턴 당시 아칸소 주지사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이때의 인연으로 루빈은 다음 해 대선에서 승리한 클린턴 행정부에서 2년간 국가경제협의회(NEC) 의장을 지낸 뒤 재무장관으로 일하게 된다.

1995년 1월 10일 장관 취임 첫날 멕시코 경제위기에 맞닥뜨렸고, 1997년엔 태국 밧화의 평가절하에서 시작된 아시아 금융위기가 그의 책상 위에 던져졌다. 외환보유액이 거의 바닥난 한국의 부도 위기 대책도 루빈이 지휘하는 재무부팀이 도맡았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 대대적인 구조조정 약속을 받아 낸 일, 각국에 전화를 걸어 한국 지원을 호소한 일 등 긴박했던 장면들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경제 참모들에게 들려줄 만한 교훈도 여럿 있다. 그중 하나. 주가가 크게 오르자 이 공(功)을 대통령이 차지하기를 원하는 백악관 참모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반대했다. 주가는 갖가지 이유로 오르내리고 현실을 과장하거나 과소평가하기도 하므로 대통령이 상승의 공을 차지하면 하락의 비난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세계 경제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의 ‘세상 기행문’을 통해 월가와 백악관의 구중심처(九重深處)를 들여다보는 재미도 적지 않다. 경제 공부도 된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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