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병철]‘換亂교훈’ 벌써 잊었나

  • 입력 2005년 11월 2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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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뚱한 사람이 갖은 노력 끝에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면 몸놀림이 가벼워지고 더욱 활기가 넘치는 것이 정상이다.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 냈건만, 몸집만 줄고 그의 삶이 더욱 무기력해졌다면 다이어트를 왜 했는지 의문이 생길 뿐이다.

1997년에 닥친 외환위기를 갖은 구조조정 노력으로 극복해 낸 경제 체제라면 지금쯤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한국 경제가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시중에는 돈이 넘쳐흐르지만 골 깊은 내수 불황으로 일자리 부족 현상은 심각하다. 성장 잠재력마저 뚝 떨어져 국민은 불안해하고 피곤해한다. 활력이 살아 있는 곳이라곤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닌 몇몇 산업과 일부 대기업뿐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 경제의 구조조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거나, 끝났다면 사후 관리가 잘못됐음을 말해 준다. 어느 쪽이건 비슷한 시기에 환란(換亂)의 소용돌이를 겪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가 착실한 발돋움을 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된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근래 들어 두드러진 정부와 민간 경제주체 그리고 시장 사이에 벌어진 틈새 현상이다. 경제는 이 세 가지 사이에 빈틈이 없을 때 기대 이상의 생산력을 발휘하고 활기차게 돌아가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시중 유동성은 과잉 상태인데 조절이 쉽지 않고, 넘치는 돈이 투자나 소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장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인류 사회의 경험에 비춰 볼 때 가장 효율적인 자원 배분 기구가 시장이라는 점에서 정책 접근을 한다면,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나 간섭을 줄이고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정부가 앞장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럼에도 양극화 해소라는 목표에 치중한 나머지 수도권의 공장 건설과 증설에 많은 규제가 상존하는 것과 출자총액 제한제도를 고집하고 있는 것은 비(非)시장적이고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정부와 기업 사이에 벌어진 생각의 틈새를 메우기 전에는 투자 활성화와 대규모 일자리 창출 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시중의 유동성이 아파트와 토지로 몰리는 것을 세금으로 억누르려는 조치도 조세권을 가진 정부의 힘에 의존하는 것일 뿐 시장의 자동조절 기능과는 거리가 있다. 정부 정책과 부동산 투자자 사이엔 여전히 틈새가 존재하기 때문에 잠잠한 듯 보이는 부동산은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는 휴화산이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부동산 거품의 위험에 놓여 있는데 유동성 운용을 실물경제 흐름과 조화시키면서 국내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으로 확대하는 등 금융기관의 관리 역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시장의 자율적 조정 기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모범 사례로 삼을 만하다. 세계의 공장이 중국으로 빨려 들어가는 제조업 블랙홀 현상에 대처해 선진국은 금융 산업의 전략화나 관광 등 고부가 서비스 산업의 개발과 육성으로 제조업의 빈자리를 대체해 나가는 장기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데, 우리의 대책은 과연 무엇인가.

내수 진작을 위해 적자 예산까지 편성하고 투자와 소비 촉진을 위해 미국보다도 낮은 저금리 정책을 구사하는데, 효과가 나지 않는 나라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정부 정책과 시장 사이에 벌어진 틈새를 메울 방도를 찾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시장 기능까지 떠맡는 ‘큰 정부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일시적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지 몰라도 여기서 왜곡된 경제는 장기적으로 더 큰 부작용을 남긴다는 사실을 명념해야 한다.

한국 경제가 환란이라는 대재앙을 맞은 것은 정부 중심의 비시장적 경제 운용으로 세계화 시대의 도래라는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했고 적응에도 실패한 때문이다. 그토록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교훈을 벌써 잊은 것일까. 큰 정부만 눈에 들어올 뿐 활기찬 시장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가는 길은 과연 세계의 흐름과 시대적 환경에 맞는 것인가.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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