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황호택]官製 대안언론 띄우기

  • 입력 2005년 11월 2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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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반(反)세계화와 반미(反美)의 선봉에 선 지도자다. 그는 베네수엘라 안에서도 ‘사회주의 해방자’와 ‘권위주의적 선동가’로 크게 엇갈리는 평가를 받을 만큼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을 꼽는 데서도 그의 정치적 성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차베스는 2002년 쿠데타 때 주류(主流)매체가 쿠데타를 지지한 데 분노했다. 그는 인터넷, 전단, 이동전화, 문자서비스, FM 라디오 같은 대안매체(代案媒體·alternative media)를 통해 국민을 동원해 쿠데타 세력을 몰아냈다. 그는 주류매체가 베네수엘라가 아니라 미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고 주장하면서 주류매체에 대항하기 위해 전국의 중소매체를 모아 ‘대안매체 전국연합(ANMCLA)’을 결성했다. 차베스는 정부 예산으로 대안매체를 지원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 놈 촘스키는 주류매체를 비판해 대안매체 운동에 불을 댕긴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촘스키는 공표된 모든 뉴스는 취재 보도를 왜곡하는 다섯 가지 여과장치를 통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섯 가지란 주류 언론을 소유한 대기업, 광고주, 정보를 제공하는 정부와 기업, 압력단체, 언론인들이 공유한 생각이다.

사회가 복잡다기해지면서 주류매체가 독자나 시청자의 세분화된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기는 어렵다. 주류매체에서 듣기 어려운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안매체에는 좌파와 우파가 다 있다. 좌파 계열의 대안매체는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주류매체의 대항매체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 격차 해소 발언을 차베스의 반세계화 노선에 비유하는 기사를 썼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주최한 나라의 대통령이 차베스와 비교된 것은 여러모로 찝찝했다. 반세계화는 별개로 치더라도 노 대통령과 차베스의 정책 중에는 꼭 닮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주류매체를 적대시하고 이에 대항하는 대안매체를 육성하는 언론정책이다.

노 대통령은 국정홍보처가 주최한 정부 토론회에서 “적절한 대안매체를 만들고 제도매체가 의제화(議題化)하지 않는 것을 의제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대변인은 노 대통령이 언급한 대안매체란 ‘국정브리핑’과 ‘청와대브리핑’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은 APEC 정상회의 중에도 국정브리핑 사이트에 들러 주류 언론을 공격하는 칼럼이나 아첨성 칼럼에 댓글을 달았다. 대통령이 휴가지에 들고 가는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듯 대통령이 댓글을 단 칼럼이 ‘베스트 뷰’가 되기를 바라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댓글의 희소성이 떨어지고 ‘사이비’까지 올라오다 보면 약발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노 대통령은 전국 공무원에게 ‘청와대의 아침엔 신문이 없다’고 강조하는 e메일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연합뉴스와 ‘국정브리핑’에 들어가면 모든 신문을 일일이 보지 않아도 필요한 기사를 놓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아침 일과에서 종이신문을 없애도 불편함이 없다는 강력한 암시다.

촘스키는 주류매체의 왜곡을 조장하는 여과장치에 정부를 포함시켰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지금 스스로 대안매체를 만들겠다고 하니 혼란스럽다. ‘국정브리핑’은 엄밀히 말해 관제(官製)언론이다. 민간의 대안언론이라도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면 정치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베네수엘라는 90% 이상의 텔레비전 매체와 주류신문이 반차베스다. 여기에 비하면 노 대통령의 언론환경은 여유로운 편이다. 그런데도 다양한 방법으로 주류매체의 영향력을 감퇴시키고 타격을 주려는 점에서 노 대통령의 언론전략이 차베스보다 더 집요한 것은 아닌가.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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