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도청근절-정치 불개입’ 내부 개혁안 윤곽

  • 입력 2005년 11월 2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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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불법 감청의 소지를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해 국정원 내에 아예 감청 장비를 보유하지 않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3일 본보가 입수한 국정원의 자체 개혁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국정원 내부엔 감청 장비를 보유하지 않되, 유·무선 통신사업자가 감청 설비를 보유하면서 국정원이 적법 절차에 따라 감청 지원을 요청할 경우 통신사업자가 이에 협조하게 하는 방안을 도입할 방침이다. 33쪽에 이르는 이 보고서는 7월 ‘국가안전기획부 X파일’ 사건 발생 직후 국정원 내에 설치된 ‘대책위원회’가 토론을 거쳐 10월 말 성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청은 근절하되 수사권은 유지해야”=개혁안은 도청 근절 의지는 확실히 했으나 조직 개편은 최소화하는 방향이다. 국정원 측은 “여론 재판식의 무분별한 개편론보다는 자체 혁신 노력에 따라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정치권력의 요구와 거기에 줄선 간부들의 부당한 지시가 도청의 한 원인이었다는 진단에 따라 국정원직원법에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에 대한 거부권 조항을 신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대테러 정보 수집 등의 차원에서 합법적인 감청은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개혁안은 또 국정원장의 임기가 대통령의 신임에 따라 좌우되는 바람에 소신 있는 조직 운영이 여의치 않은 만큼 국정원장 임기제 도입을 정부와 정치권에 건의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개혁안은 안보수사권 폐지에 대해서는 북한의 대남(對南) 침투 행위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 의견을 분명히 했다.

국정원 측은 “(북한은) 6·15정상회담 이후에도 한반도 적화전략을 고수하면서 제3국 우회 침투 등의 대남 공작 활동을 유지하고 있다”고 적시했다.

▽실현 가능성 있나=개혁안 중 국정원장 임기제나 감청 장비의 외부 보유 등 대부분의 사항은 국회에서 법을 개정해야 하는 사항이다.

여야 정치권에선 국정원의 국내파트를 없애고 수사권을 폐지하는 등 좀 더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 앞으로 국회 논의 과정에서 국정원 측과의 갈등이 예상된다. 여야는 국회 정보위원회의 국정원개혁소위원회 차원에서 올해 말까지 별도의 국정원 개혁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열린우리당 ‘국정원 개혁기획단’ 부단장인 김성곤(金星坤) 의원은 “국정원 조직을 해외와 국내파트 등 지역별로 나누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며 “테러, 산업, 국제범죄 등 기능별로 나누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한나라당 강재섭(姜在涉) 원내대표는 “국제화 시대에 맞게 정치 개입, 권력남용, 불법 감청을 못하게 하는 내용을 담으면서도 국정원의 중요성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책임회피 아니냐”=한편에선 국정원의 자체 개혁안이 지나치게 ‘무사안일주의’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 안보 전문가는 “국정원이 국가안보 차원의 정보 입수를 위해 감청할 것은 책임지고 감청해야 한다. 그런데도 감청 장비를 내부에 보유하지 않겠다는 것은 책임 회피”라고 말했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상부의 불법 부당한 지시는 거부해야 마땅하지만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기본적으로 ‘불법’을 감수해야 하는 공작 활동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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