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영언]부모 된 罪, 정부의 罪

  • 입력 2005년 11월 2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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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나면서 고교 3년생 딸을 둔 주부 A 씨는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대입 논술시험이나 심층면접에 대비해 ‘반짝 과외’를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고정적인 사교육비 부담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재수(再修)를 하게 되면 사정이 전혀 달라지겠지만.

서울 서초구에 사는 A 씨가 금년 들어 매달 딸을 위해 지출해 온 사교육비는 135만 원. 국어와 수학은 학원수강, 영어와 과학은 개인과외를 했다. A 씨의 주변엔 매달 200만∼300만 원, 또는 그 이상을 쓴 학부모도 적지 않다고 한다.

대입 수험생의 사교육비는 지역과 소득 수준에 따라 차이가 많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채창균 연구위원이 전국의 고교 3년생 1926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지난달 공개한 자료가 최근 통계다. 이에 따르면 고교 3년생의 월평균 사교육비는 서울이 50만 원, 광역시가 28만2000원, 중소도시는 27만9000원, 농어촌은 14만1000원이다.

가구 소득별로 보면 월수입 500만 원 이상은 61만9000원, 400만∼499만 원은 42만4000 원, 300만∼399만 원은 31만2000원, 200만∼299만 원은 20만3000원, 100만∼199만 원은 10만9000원, 100만 원 미만은 6만1000원이다. 소득이 높건 낮건 가계 수입의 10% 정도를 1인당 사교육비로 쓰고 있는 셈이다.

공교육에서 못하는 부분을 대신하고 특기와 적성을 살린다는 측면에서 학교 밖의 사교육은 필요하다. 문제는 우리의 사교육 대부분이 그런 차원이 아니라 학생을 ‘수능 기술자’로 만드는 비생산적, 비교육적 과정이라는 점이다. 대입 수험생뿐만 아니라 초중고교 12년에 걸쳐 안 해도 될 일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학부모들은 “이건 아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과외를 시킬 수밖에 없다. 남들이 다 과외를 시키는 마당에 자기 자식만 안 시키면 왠지 불안하고, 뒷날 두고두고 원망을 살 수도 있다는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 된 죄(罪)다.

이러니 각종 경제지표가 추락하는데도 사교육 시장에는 돈이 넘쳐 난다. 학원 재벌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공교육의 황폐화는 학원 산업이 쑥쑥 자라는 토양이다. 그러고 보면 좋은 학교를 만들자는 취지의 교원평가제에 반대하는 일부 교사의 행동을 가장 반기는 사람도 학원 경영자나 강사가 아닐까.

역대 어느 정권도 사교육비 추방을 외치지 않은 적이 없다. 현 정부도 교육방송(EBS)의 수능 강의 확대에 이어 사교육을 학교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과 후 학교’를 추진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달 초 “학부모에게 사교육비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며 “5년 정도 후에 사교육 수준은 학교에서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역대 정권에서 교육정책의 실패를 수없이 겪어 온 학부모들로선 이번에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모습이다.

수험생을 뒷바라지해 온 학부모들에게 수능 일은 잠시 한숨을 돌리는 날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땅의 대다수 학부모에겐 매년 돌아오는 수능 일이 두렵기만 하다. 가계를 짓누르는 무거운 사교육비 사슬을 홀로 헤쳐 나가야만 하는 이들에게 정부는 너무 큰 죄를 짓고 있다.

송영언 논설위원 yo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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