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이고 꼬리물고 알쏭달쏭 판결문… “읽다 숨넘어가요”

  • 입력 2005년 11월 21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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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기자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판결문이 불필요하게 어려워 해독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판결문을 접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설득 당하기는커녕 우리네 삶에 도움이 되는 지침이나 정보를 얻는 일마저 쉽지 않다는 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최근 대법원 공보관(판사)이 기자들에게 보낸 e메일 ‘11월의 편지’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판사와 법원출입기자가 보기에도 어려운 판결문. 그렇다면 법을 잘 모르는 일반 시민에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려운 판결문은 법에 대한 시민의 이해와 소통을 가로막는, 법치주의 실현의 장애물이다. 판결문이 얼마나, 그리고 왜 어려운지 분석해 보았다.》

읽다가 숨이 넘어갈 정도로 긴 문장, 어려운 한자어나 일본말의 잔재, ‘위법하다고 아니할 수 없어 파기를 면할 수 없다’는 것처럼 꼬고 또 꼬는 문장.

본보 법조 취재팀이 10월 25일∼11월 15일 선고된 대법원과 서울고등법원,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결문 10개씩 모두 30개를 무작위로 골라 분석한 결과 나타난 판결문의 ‘특징’이다.

▽상급법원 갈수록 문장 길어져=30개 판결문을 대상으로 재판부 명칭과 원고 및 피고, 판결 주문이 있는 표지를 제외하고 ‘이유’부터 ‘결론’까지 판결문의 본문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 본문 한 문장의 평균 길이(글자 수)는 △대법원 373.2자 △서울고등법원 317.5자 △서울중앙지방법원 304.2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상급법원으로 갈수록 판결문의 문장 길이가 긴 것으로 나타났다. 문장이 길면 주어와 술어가 복잡해져 이해하기 어렵다. 국어학자들은 한 문장의 글자수가 100자를 넘으면 이해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대법원이 지난달 28일 무죄를 선고한 ‘안풍(安風) 사건’ 판결문의 경우 한 문장이 2794자나 되는 것도 있었다. A4 용지 4장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이 판결문에는 1509자, 1114자나 되는 문장도 있었다.

이처럼 상상을 넘을 정도로 긴 문장은 판사들이 같은 사건과 같은 쟁점이면 같은 문장(한 문장)에 표현하려는 방식을 고집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암호문 같은 ‘주문(主文)’=최근 민사소송에서 이기고 판결문을 받은 이모(38) 씨는 재판 결과가 쉽게 이해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판결문의 ‘주문’에는 ‘피고들(2명)은 각자 원고에게 20,000,000원 및 각 이에 대하여 소장 부본 송달 익일부터 완제일까지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고 적혀 있었다.

원고 이 씨는 ‘피고들은 각자 원고에게… 지급하라’는 부분을 보고 “1인당 2000만 원씩 모두 4000만 원을 받겠구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 씨의 판결문 이해는 잘못된 것이다. 암호문 같은 ‘주문’ 때문에 이 씨가 혼동한 것이다. 판결문에서 ‘각자’는 ‘연대하여’ 또는 ‘공동으로’ 책임을 지라는 뜻이고 ‘각’은 모두 따로 또는 별도로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2명이) 각자 2000만 원을 지급하라’는 표현은 두 사람 중 한 명이 2000만 원을 지급하거나 두 사람이 각각 1000만 원씩 2000만 원을 지급하든지 해서 원고에게 2000만 원이 지급되도록 하라는 뜻이다.

▽어려워야 권위 선다?=간단하고 쉬운 표현도 일부러 어렵고 복잡하게 표현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익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실익이 있다)” “위법하다고 아니할 수 없어 파기를 면할 수 없다(위법해 파기한다)”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니… 판결한다(지급할 의무가 있어… 판결한다)”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산입(算入·포함시켜)해’ ‘위자(慰藉·위로하고 도와줄)할’ ‘익일(翌日·다음날)’이니 ‘완제일(完濟日·다 갚는 날)’처럼 어려운 한자어도 일반인의 판결문 이해를 어렵게 한다.

▽법원도 개선 노력 중=대법원도 이 같은 사정을 깨닫고 판결문을 쉽게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문제점이 많이 남아 있다. 몇 년 전부터 사법연수원에서는 예비 법관들이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판결문을 쓰도록 교육받고 있지만 아직 법원 전체로 확산되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경력이 많은 고참 법관일수록 판결문을 어렵게 쓰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복잡한 법률관계가 얽혀 있는 사건에 대해 판결문을 쉽고 짧게 쓰는 것을 강조하다 보면 당사자가 잘못 이해하는 오류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판사들은 역시 ‘짧고 알기 쉽게 쓰는’ 것이 ‘대세’라고 말한다.

법원에서도 판결문을 좀 더 짧고 쉽게 쓰기 위한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법원행정처 민사 사법제도 개선 연구팀은 최근 판결문을 짧고 간결하게 쓰는 것이 법관의 업무부담도 줄여 줄 것으로 보고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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