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아파트촌의 재두루미

  • 입력 2005년 1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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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7시경 경기 김포시 사우지구 아파트 단지 인근에 있는 홍도평야. 가을걷이가 끝난 늦가을 논은 을씨년스럽다. 이때 한강 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함께 반가운 ‘손님’들이 나타났다. 하나 둘 셋…. 어림잡아 서른이 넘는다. 재두루미(천연기념물 203호)다. 이들은 비행 편대를 연상시키는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날아왔다. 곧 내려앉을 것 같던 이들은 공중에서 서너 차례 선회한 뒤 처음 가깝게 접근했던 논을 포기하고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재두루미는 한반도를 찾는 철새 중에서도 ‘진객(珍客)’으로 꼽힌다. 세계적으로 6000∼7000마리만 생존해 있는 멸종위기종이다. 몸 대부분이 흰색인 두루미와 달리 청회색을 띠고 있어 재두루미라고 한다. 8일부터 12일까지 홍도평야를 중심으로 김포 일대 재두루미의 일상을 취재했다.》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중에서

○ 재두루미와 아파트

경기 김포시 홍도평야에 내려앉은 재두루미 무리가 논에서 먹이를 찾다가(왼쪽)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아파트 사이로 날아가고 있다.

12일 관찰한 재두루미는 37마리로 확인됐다. 취재를 시작한 뒤 가장 많은 수다.

재두루미들이 ‘착륙’한 장소는 고영춘(64·김포시 사우동) 씨의 논. 그는 2003년 겨울철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철새들을 위해 방앗간에서 덜 여문 벼를 구해 뿌려 주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재두루미들은 그의 논을 다시 찾았다.

재두루미와 인근 아파트 단지 사이의 거리는 400m가 되지 않는다. 대규모 주거단지인 아파트와 자신들의 터전에서 점차 밀려나는 재두루미의 만남은 낯설고 신기하다.

재두루미의 ‘아침 식사’는 지켜보는 사람의 조바심을 자아낼 정도로 불안해 보였다. 이들은 부리를 이용해 볏 짚 사이 낟알이나 얕은 물에서 자라는 매자기 뿌리를 찾고 있다. 소리가 나거나 사람이 접근하면 금세 긴 목을 세웠다. ‘눈칫밥’이 따로 없다. 목을 세우는 횟수가 늘더니 앉은 뒤 30분이 못 돼 일제히 공중으로 날아갔다. 아쉬운 듯 하늘을 선회했지만 이내 포기했는지 한강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뚜르륵’ 하는 재두루미 특유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경기 파주시, 강원 철원군과 함께 대표적인 재두루미 도래지인 이곳에 1998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현재 75동 8000여 가구에 이른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재두루미가 떠난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이들은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아파트가 바람을 막아 주는 병풍 역할을 해 재두루미가 좋아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 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속사정은 다르다.

“재두루미는 잠자리와 먹이터를 좀처럼 바꾸지 않는 습성을 갖고 있다. 방풍 효과가 있을 수는 있지만 아파트 건설로 근본적인 서식 환경은 크게 나빠졌다. 홍도평야의 재두루미들은 익숙한 생활공간을 떠나지 못하는 ‘고집 센’ 그룹이다.”(한국환경생태연구소 이기섭 박사)

○ 재두루미의 추억

1970년대 이 일대에는 2000개체 이상의 재두루미가 도래했지만 현재는 100개체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이 지역이 대표적인 재두루미 도래지가 된 것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한강 하구 갯벌의 다양한 수생생태계, 비무장지대(DMZ)로 형성된 안전한 잠자리, 추수가 끝난 평야 지대의 풍부한 먹잇감 때문이다.

한때 김포반도는 재두루미들의 ‘오아시스’였다. 일부는 이곳에서 겨울을 보냈고, 다른 개체는 체력을 보충한 뒤 다시 일본 가고시마 현으로 날아갔다.

이들의 번식지인 러시아 힝간스키 자연보호구에서 김포까지는 무려 2000여 km. 매년 본능에 따른 재두루미의 비행 약속은 어김없이 지켜졌다.

하지만 이제 재두루미들에게 풍요로웠던 ‘김포의 추억’은 점점 나쁜 기억으로 바뀌고 있다. 내년 말에는 홍도평야를 관통하는 김포우회도로가 완공된다. 재두루미의 서식 공간은 도로와 주거 시설에 사실상 포위되는 셈이다.

○ 일본으로 떠나는 재두루미

재두루미도 인위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우회도로 아래 한강 쪽 홍도평야는 재두루미의 날갯짓이 끊겼다. 14년째 이곳에서 재두루미 보호활동을 펼치고 있는 윤순영 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은 “재두루미는 한번 먹이를 먹기 시작하면 장소를 잘 옮기지 않는데 위협이 잦아지자 ‘메뚜기’식으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고 있다”며 “재두루미에게 나쁜 추억이 계속 쌓인다면 결국 떠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서식 환경의 악화로 이 지역을 월동지가 아닌 중간 경유지로만 이용하는 재두루미도 늘고 있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과 표식 발 가락지를 통한 연구 결과, 재두루미의 상당수가 김포에서 휴식을 취한 뒤 가고시마 현 이즈미 시에서 겨울을 지내는 것으로 확인된 것.

9일 우회도로 건설 현장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자동차 소리가 재두루미를 포함한 철새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면서도 “민가가 있는 곳에는 방음벽을 설치하지만 재두루미가 머무는 공간에 대한 환경적 배려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 재두루미 가족

수명이 20년 이상인 것으로 알려진 재두루미는 ‘가족애’가 강한 새로 유명하다. 동물원에서는 70년 가깝게 생존했다는 기록도 있다.

11일 오전 11시경 홍도평야 인근 향산리 학터에서 재두루미 4마리를 관찰했다. 새끼 2마리가 있는 ‘재두루미 가족’이다. 인적이 드문 곳이지만 ‘부부 두루미’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반면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새끼들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여유 있게 먹이를 찾았다. 성장한 재두루미는 몸무게가 5~8kg, 몸길이 127cm, 날개길이 220cm이며 보통 두 개의 알을 낳는다. 가족 단위인 경우 사람이 비교적 가깝게 접근해도 새끼의 체력 저하를 우려해 비행 횟수를 줄인다.

재두루미는 한번 짝을 맺으면 배우자가 죽을 때까지 거의 짝을 바꾸지 않는다. 수명이 짧은 새는 번식할 때만 사귀는 반면 이들은 계절에 관계없이 짝을 지어 다니는 등 ‘금슬’이 좋다. 대부분의 새가 짝이 있기 때문에 늙은 재두루미는 ‘재혼’도 쉽지 않다는 게 전문가의 설명이다.

“재두루미는 푸른 도포를 입은 선비처럼 색깔도 예쁘고 나는 모습도 귀족적이어서 좋아한다. 무리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부부 두루미’도 목격했는데 사람보다 다정해 보여 놀랐다.”(김금선 씨·37·김포시 북변동)

○ 재두루미의 시위

재두루미를 비교적 가깝게 접한 경험이 있는 주민들은 재두루미의 보호에 긍정적인 반응이다.

고영춘 씨는 “집 근처에서 재두루미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자연이 준 축복”이라며 “재두루미와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류 인플루엔자(AI)에 대한 우려는 큰 편이 아니었다.

주민 김명희(40·김포시 북변동) 씨는 “이달 말 주남저수지로 철새를 보기 위한 탐조여행을 계획했지만 최근 AI 때문에 포기했다”며 “김포는 상대적으로 철새 수가 적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판단해 아이들과 근처에서 관찰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또 다른 주민은 “재두루미 등 이 지역을 찾는 철새 때문에 개발이 제한됐다”며 “주민들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는 게 아니라 재두루미를 보호하면서도 지역 주민이 함께 살 수 있는 해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역 환경 단체에서는 보리 농가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1년에 6000여 만 원의 예산을 집행하고 있는 ‘미(未)수확존치 생물다양성 계약’을 벼에까지 확대하고, 일정 지역의 토지 매입을 통한 장기적인 보호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김포시청 환경위생과 임병준 과장은 “우회도로 건설은 주민들의 숙원 사업”이라며 “도로와 아파트가 있기 때문에 철새들이 오지 않는다는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두루미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도 있다.

이기섭 박사는 “현재처럼 개발이 계속된다면 10년 뒤에는 김포에서 재두루미가 사라질 수도 있다”며 “아파트 앞을 날고 있는 재두루미의 모습은 목가적인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권을 주장하는 ‘시위’ 아니냐”고 말했다.

글=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사진=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재두루미 관찰일지▼

야생조류보호협회 윤순영(사진) 이사장은 김포에서 ‘재두루미 아버지’로 불린다. 사진작가인 그는 1992년 12월 홍도평야에서 재두루미 7마리를 처음 본 뒤 재두루미와의 ‘사랑’을 시작했다. 그의 관찰 일지를 통해 재두루미에 얽힌 사연을 소개한다.

△1992년-첫 만남

난생 처음 보는 재두루미가 나를 사로잡았다. 있는 듯 없는 듯 번잡하지 않고, 우아함과 품격이 돋보인다.

△1995년-아파트 건설

홍도평야 일부에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재두루미 터전에 위협 요소로 작용하지 않을까?

△1999년-독극물 사건

촬영 중 카메라 망원렌즈에 이상한 사람이 들어왔다. 추격전 끝에 그를 잡았다. 농부였다. 독극물을 수거해 재두루미 몰살 위기를 모면했지만 씁쓸하다.

△2001년-우회도로 건설

재두루미 서식지인 홍도평야를 관통하는 우회도로 건설이 시작됐다.

△2002년 1월-삼형제 재두루미

눈이 오자 재두루미들이 먹이를 구하는 게 힘들어졌다. 새끼 3마리를 데리고 있던 재두루미 부부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3마리 새끼를 거느린 경우는 드물다. 삼형제 두루미라고 이름을 지었다.

△2002년 1월-재식이 발견

1월 24일 생후 6개월로 추정되는 재두루미를 발견했다. 탈진한 상태로 발목과 오른쪽 날개에 타박상이 있고, 왼쪽 다리를 약간 절었다.

△2002년 11월-KBS ‘환경스페셜’의 전화

환경스페셜 팀에서 연락이 왔다. 재식이에게 GPS를 부착하여 이동경로를 추적하자는 제의였다. 재두루미 생태 연구와 재식이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기에 승낙했다.

△2003년 1월-재식이 방사

23일 GPS를 부착해 재식이를 방사했다. 하지만 재식이는 처음 방사된 곳으로 3일 만에 돌아왔다. 항상 외톨이였다. 15일이 지나자 무리와 합류했지만 그 뒤 GPS 수신을 받을 수 없었다.

△2003년 3월-재식이의 죽음

재식이가 김포시 걸포동 한강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탈진한 상태였다. 미안하다, 재식아. 그래도 내 마음속에는 네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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