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광표/정치논리에 상처 입은 ‘국보 1호’

  • 입력 2005년 11월 1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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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호를 숭례문에서 다른 문화재로 바꾸자는 논란이 ‘당분간 현행 유지’로 일단락됐다. 문화재위원회 국보지정분과가 내년 초 이 문제를 다시 한번 논의하기로 했지만 국보 1호가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 대신 내년 논의에선 국보의 지정 번호를 아예 없애는 방안을 집중 검토하기로 했다.

14일 국보분과의 결정을 접한 국민 가운데는 “어떻게 그리 쉽게 결정이 나 버렸지”라며 의아해하는 반응이 많았다. 사실 기자도 이렇게 빨리 ‘국보 1호 교체 불가’로 결론이 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어서 최소한 몇 달에 걸쳐 수차례의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럼, 왜 이렇게 일찍 결판이 난 것일까. 국보 지정 문제는 문화재위원회의 고유 권한인데도 정부가 이를 무시한 채 국보 1호 교체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우선 감사원이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국보 1호 교체 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점이 그렇다. 특히 국보 1호에 일제 잔재라는 오명을 덧씌워 교체 분위기를 만들어 가려 했다는 점이 전문가들의 반발을 샀다. 안휘준(安輝濬) 문화재위원장이 14일 “국보는 광복 이후 전문가들에 의해 신중하게 지정된 것”이라고 일침을 가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유홍준(兪弘濬) 문화재청장이 “국보 1호를 바꾸는 데 (국민 사이에) 큰 이론은 없고, 새로운 국보 1호로는 훈민정음이 적합하다”고 발언한 것도 부적절했다.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 사안인데도 교체를 기정사실처럼 몰아간 것이다.

더구나 이 문제는 1996년에 문화재위원회가 ‘교체 불가’로 결정을 내렸던 사안이다. 불과 9년 만에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다시 들고 나왔기 때문에 정치논리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문화재마저도 이념과 역사관의 잣대로 재평가하겠다는 오만이 빚은 결과다.

이번 논란엔 애초부터 문화논리가 빠져 있었다. 국보분과 위원들이 아예 첫 회의에서 정치논리를 거부하고 문화논리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한 문화재위원의 말이 생각난다. “일제 잔재 운운하는 것은 국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정작 우리가 논의해야 할 일은 ‘국보를 얼마나 잘 보존하고 또 관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광표 문화부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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