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미석/‘평범’의 재발견

  • 입력 2005년 11월 1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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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학교는 구경도 못했다. 고급 레스토랑 주방장 출신은 더더욱 아니다. 고등학생 때 엄마가 일하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설거지하고 접시 나른 것이 음식과 인연을 맺은 계기라면 계기다. 대형 마트의 판매원을 거쳐 작은 식품점의 구매담당 겸 요리사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명절 판촉행사로 30분 안에 간편하게 식탁을 차릴 수 있는 요리 강좌를 열어 보았다. 의외로 호응이 높아 슈퍼마켓을 돌며 ‘30분 요리’ 강좌를 시작했고 그 인연으로 7년 전 작은 출판사에서 첫 요리책을 펴냈다.

레이철 레이(37) 씨. 요즘 미국에서 요리에 관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요리 프로그램 진행자의 평범한 이력이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하였다. 그의 소박한 요리책들은 450만 부가 팔렸다. 특급 출판사 랜덤하우스와 600만 달러의 저작권 계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30분 요리’는 이제 케이블 방송 ‘푸드 네트워크’의 간판 프로그램이 됐다. 자기 이름을 상표로 붙인 주방용품이 출현했고 ‘매일매일 레이철 레이와 함께’라는 제목의 잡지가 나올 예정이다. 얼마 안 있으면 오프라 윈프리 프로덕션이 참여하는 토크 쇼의 사회자로 데뷔한다. 어느새 1인 브랜드의 제국을 거느린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그의 무엇이 대중을 사로잡은 것일까. 듣도 보도 못한 재료에 희한한 요리 기구로 만들어 내는 유명 요리사들의 최고급 음식이 ‘그림의 떡’과 같다면, 냉동식품과 통조림을 활용하는 그의 스피드 요리는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평범함을 그 핵심으로 한다. 그는 마치 가족 앞에서 요리하듯, 큰 소리로 웃고 수다 떨면서 30분 만에 한 끼의 식사를 뚝딱 마련해 보인다. 정식 교육에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엘리트 요리사들은 그를 ‘무늬만 요리사’라고 애써 무시하지만 대중은 자신들과 비슷하게 보이는 그를 더 사랑하고 아낀다.

위스콘신 주에 사는 조니 레크너(29) 씨는 대학만 12년째 다닌다. 그는 평균에도 못 미치는 ‘모자람’으로 뜬 인물이다. 명문대생도 아니고 졸업한다고 뾰쪽한 취업 대책도 없고 해서 아예 전공을 바꿔 가며 ‘직업대학생’으로 뭉그적거리는 그의 생활이 화제가 되면서 토크 쇼 출연과 책 계약,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따라붙었다. 앞으로 졸업 때까지 학비를 대 주고 취직까지 시켜 주겠다는 제의도 받았다. 남의 일 같지 않은 그의 경험이 대중의 공감을 산 것이다.

바야흐로 특별한 재능, 남다른 배경이 아니라 ‘평범함’이 뜨는 시대가 온 것일까. 국내에서도 2년 전 평범한 독신남이 1년 동안 혼자 살며 해 먹은 음식을 책으로 펴내 대박을 터뜨렸다. TV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삼순(김선아)과 ‘프라하의 연인’의 최상현(김주혁)을 봐도, 평범하고 당당한 사람들의 정감 넘치는 캐릭터가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평범함을 거부하고 일부러라도 튀어야 생존한다는 풍조가 한때 만연했다. 그런데 이제 ‘평범함의 재발견’이 새로운 추세로 고개를 드는 기미가 보인다.

내 평범한 생활과 경험이 훌륭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굳이 자기의 평범함을 탓하고 감출 필요가 있을까. 평범하다고 비범한 성공을 거두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요즘같이 강퍅한 세상에선 되레 내 본래의 모습을 고수하는 것이 미덕이자 경쟁력이 될 것 같다.

고미석 문화부 차장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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