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승철]386 실세들 ‘드러커의 내공’ 배워야

  • 입력 2005년 11월 1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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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에게 붙일 수 있는 극존칭을 꼽아 보자. 영웅 거목 태두 등은 큰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붙는다. 뛰어난 학자는 석학, 높은 정신세계를 구축한 사람은 철인(哲人), 신체 능력이 탁월한 체육인은 철인(鐵人)으로 불린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이런 인물 앞에서라면 고개가 절로 숙여지지 않으랴.

현명한 인물을 일컫는 현인(賢人)은 어떤가.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좀 살가운 느낌이 들지 않는가. 현인은 빛나되 현란하지 않기에….

이 시대의 진정한 현인 피터 드러커(1909년생) 교수가 11일 타계했다. 그는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러나 출중한 학문적 성과를 남겼다는 이유만으로 현자(賢者) 반열에 오를 수는 없다. 타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인물이어야 현인이란 호칭이 어울리지 않겠는가.

그는 정신적 가치를 우위에 두는 여느 선현(先賢)과는 달리 “풍요로운 삶을 누리려면 물질적 토대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생산 활동의 주역이 기업인 시대에 그는 기업을 연구하는 경영학을 화두(話頭)로 삼았다.

그는 고고한 천재가 아니라 소박한 식당에서도 쉬 만날 수 있는 소탈한 사람이다. 오스트리아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세상을 이해하려면 밥벌이에 몸을 던져 봐야 한다”고 17세 소년은 주장했다. 고향을 떠나 독일 함부르크의 어느 상점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그 후 은행의 애널리스트로 잠시 일하다 신문사 금융담당 기자로 발탁됐다. 4년간 신문 기사를 쓰며 대학에 다녔다. 학업 성적이 뛰어났으며 정치학 박사학위도 받았다.

청년 시절의 행적만 봐도 그가 책상물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공허한 이론보다 실천할 수 있는 지식을 설파하는 데 앞장섰다. 예를 들면 지금은 경영학의 기초원리가 된 목표 관리(MBO)란 개념을 제창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역설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는 대학교수로 수십 년간 활동하면서 다양한 과목을 강의했다. 경영학 이외에 경제학 윤리학 정치이론 통계학 일본예술론 등을 가르쳤고 35권의 저서를 냈다. 여러 학문을 섭렵한 것은 경영 활동이 한 가지 학문 관점에서만 파악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차원 높은 통섭(通涉)의 경지에 오른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발휘했다. 부존자원이나 자본보다 지식의 가치가 돋보이는 시대가 올 것을 오래전에 예견했다.

그는 ‘한강의 기적’에도 관심이 많았다. 천연자원이 거의 없는 한국이 최빈국에서 몇 십 년 만에 선진국 언저리에 접어든 데 대해 인재를 잘 교육했기 때문이라 풀이한 바 있다. 저서에서 한국을 기업가 정신이 가장 뛰어난 국가로 소개했으며 한국인 학자와 기업인들을 만나면 따스한 애정을 나타냈다고 한다.

드러커 교수 덕분에 오늘날 미국의 번영이 가능했다고까지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 수많은 경영자, 관리자가 그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아 효율적인 경영을 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기업뿐 아니라 정부 학교 종교 자선단체 등 비영리 조직에서도 경영 원리를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직 목적을 잘 이루려면 신념이나 혈기만으로는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현인이 쌓은 내공을 활용하면 삶의 질을 높이는 길이 보인다. 좌파 경제이론에 심취했던 한국 현 정권의 386세대 실세 그룹이나 진보 성향의 학자들에게 드러커 같은 경영학자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사숙(私淑)하지 않고는 지식사회에서 번영을 이루기가 어렵다.

현인을 추모하는 만사(輓詞) 말미에 “한국 경제가 미몽에서 빨리 벗어나는 지혜를 달라”는 염원을 덧붙인다.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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