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리다르노시치 25주년]<下>레흐 바웬사와 과거사 문제

  • 입력 2005년 11월 16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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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항구 도시 그단스크의 조선소에서 전기공으로 일하며 노조 지도자로서 명성을 쌓아 온 레흐 바웬사는 1980년 8월 전국파업을 계기로 폴란드 민주화혁명에 불을 지폈다. 당시 시위대 속에서 목말을 타고 있는 바웬사. 동아일보 자료 사진
폴란드 항구 도시 그단스크의 조선소에서 전기공으로 일하며 노조 지도자로서 명성을 쌓아 온 레흐 바웬사는 1980년 8월 전국파업을 계기로 폴란드 민주화혁명에 불을 지폈다. 당시 시위대 속에서 목말을 타고 있는 바웬사. 동아일보 자료 사진
《북해(北海)의 ‘한자’ 도시 그단스크는 지금도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다. ‘긴 장터’란 이름의 중앙광장 끝 ‘그린 게이트’ 건물 4층의 사무실로 솔리다르노시치의 영웅 레흐 바웬사를 찾아가 만났다. 권좌에 오르고서도 필부 시절의 땟물을 벗지 못하는 무지렁이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전자는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구경하고 있으니 예를 들 필요도 없고 후자의 경우는 바웬사가 제왕적 보기가 아닌가 싶다. 그단스크 조선소의 파업을 주도(1980년)했던 전기공이 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을 때(1990년)만 해도 바웬사는 노동자의 땟물을 벗지 못한 무지렁이였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 본 그는 잘 손질한 은빛 콧수염과 은발도 점잖은 온화한 풍모의 ‘전직’이었다. 나는 대담을 시작하자 이내 그의 개방적인 성품에 매료됐다. 농담 육담을 거리낌 없이 섞어 얘기하는 그의 넉살도 사람을 끄는 데가 있었다.

―소련이 두렵지 않았느냐고? 물론 소련은 핵의 초대 강국이다. 그러나 무얼 가졌다는 것과 그걸 쓴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모든 남성은 예비 강간범으로 잡아 가둬야 되지 않나?

―폴란드인 교황의 탄생. 그것은 폴란드를 위한 희망의 신호였다. 그의 고국 방문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많으며 얼마나 힘 있는지 느꼈고 공산당이 실제론 소수파라는 것도 알게 됐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등장도 우리들의 성공에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는 공산주의를 개혁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공산주의란 개선될 수가 없는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패배가 곧 그의 승리인 셈이다.

―폴란드 민주화 이후 왜 공산당의 후신(사회민주당)이 다시 집권하게 됐느냐고? 그게 민주주의다. 정권교체가 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싸웠던 것이다. 다행히 사민당에 범죄자는 없었다. 게다가 폴란드엔 예나 지금이자 진짜 공산주의자도 없다.

―나는 일생 동안 꼭 한 사람의 진짜 공산주의자를 만났는데 그는 곧 당에서 축출되고 말더라. 폴란드인은 겉만 빨갛고 속은 하얗다. 아니 속은 검다고? 그렇지, 겉으론 공산당원이고 속은 가톨릭 신자지.

폴란드의 개혁 과정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자 자유노조 내부에 노선 투쟁이 벌어졌다. 모든 걸 일시에 쟁취하자는 ‘맥시멀리즘(과격주의)’과 점진적 개혁을 모색하는 ‘살라미(얇게 썰어 먹는 이탈리아 소시지) 전술’ 사이에. 체제전환이 평화적으로 이뤄진 것은 바웬사가 이끈 후자의 승리를 뜻한다.

1989년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과 바웬사 측의 원탁회의 협의를 통해 자유노조 연대가 다시 합법화되고 ‘자유선거’를 쟁취했을 때도 자유노조 측은 하원에서 합의된 ‘권력 분점’의 35%만을 차지해 투표로 야루젤스키 장군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 대신 신임 대통령은 자유노조 지지자인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에게 조각을 위촉해서 1989년 9월 공산권에서 최초의 비(非)공산당 정부를 출범시킨다. 마조비에츠키가 총리로 내린 결정 중에 가장 유명할 뿐 아니라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이른바 ‘비엘키에 자코인체니에(굵직한 종지부)’를 긋자는 것이다. 공산당 치하에 있었던 여러 비리, 비행 등을 따지고 캐묻는 끝없는 천착을 대범하게 끝맺어버리자는 것이다.

가령 과거 ‘소련 비밀경찰의 주구(走狗), 폴란드의 스탈린’으로 악명 높았던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전 당수는 오늘날에도 바르샤바의 거창한 무덤에 묻혀 있다. 그를 문제 삼은 시의회의 논쟁은 “사자를 평화롭게 잠들게 하고 신이 그를 재판케 하라”는 말로 종결짓고 말았다.

물론 반대와 불만이 없을 수 없다. 폴란드가 민주화된 후에도 정당만 옮기고 계속 특권을 누리려는 무리들. 그들에 대해 “공산당 시절엔 전화기 셋을 놓았던 책상에 지금은 전화기 둘만 놓아주어도 여비서와 카펫, 화분이 있는 사무실에서 일할 수만 있다면 어떤 정부 밑에서도 여전히 충성스럽고 재치 빠르게 봉사한다”고 폴란드의 대표적 작가 안제이 슈치피오르스키는 쏘아붙였다.

그처럼 ‘전천후 특권층’을 보는 일반 시민의 눈이 고울 수가 없다. 이러한 배경에서 올가을 대선에서 좌파를 누르고 승리한 우파의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은 다시 ‘과거사’를 문제 삼겠다고 나섰다. 그에 대한 바웬사의 견해를 물어봤다.

―마조비에츠키 총리는 대선에서 내 반대편에 돌아섰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사람들이 적대하는 건 좋지 않다. 그러나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사에 대한 ‘굵직한 종지부’를 그은 것은 마조비에츠키가 한 일 중에서 최선의 것이다.

나 자신도 그 자리에선 같은 정책을 폈을 것이다. 이제 와서 공산당의 과거를 다시 들춘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물론 범죄자는 단죄돼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당원으로 있었던 사람들은 편하게 있게 해 줘야 한다. 그들에겐 가족도 있다. 그보다도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 시작하는 것, 폴란드의 재건이다.

―야루젤스키 장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내가 장군의 자리에 있었다면 달리 처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사람들의 과거를 판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모르고 있고 모든 행동의 동기를 알 수는 없다. 그렇기에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된다. 나는 야루젤스키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다. 과거사는 역사가의 판단에 맡겨야 된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선 1980년대에 자유노조 연대와 같이 싸웠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물어봤다. 가령 자유노조와 연대한 경제학자로 예지 부제크 총리의 고문으로 있던 발데마 쿠친스키도, 또는 노동자 출신으로 관세청장을 지내고 바르샤바 시장선거에서 낙선한 뒤 솔리다르노시치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는, 무척이나 진지한 즈비그니에프 부야크도 과거사 재론에 대해선 부정적 내지 회의적이었다.

심지어 자유노조와 연대한 지식인 가운데서 가장 많이 알려진, 폴란드 최고의 권위지 ‘가제타 비보르차’의 주필 아담 미흐니크도 “1981년의 계엄령은 아마도 나라를 소련의 간섭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선포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한 사람 이번 여행 중 바웬사와의 우의를 특히 자랑하며 과거사에 대한 척결을 단호하게 주장하는, 가장 옷 잘 입은 신사를 보았다. 국회의 고위직에 있었고 그 뒤 외국에 대사로 근무하다 은퇴했다는 사람이다. 국회 고위직에 있던 시절의 당적을 알아보니 한 대도시의 노동당(공산당) 제1서기로 돼 있었다.

“비엘키에 자코인체니에. 과거사의 판단은 역사가에게 맡겨라.”

바웬사 앞에서 나는 진짜 ‘통 큰 사람’을 만났음을 깨달았다.

최정호 객원 大記者 동유럽 리포트-그단스크(폴란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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