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원홍]좌절 모르는 소녀 복서들에게 보내는 박수

  • 입력 2005년 11월 15일 03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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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의 소녀들이 외모를 가꾸거나 첫사랑에 울고 웃을 시기인 10대 후반. 그들은 격투의 무대에 오르고 있다. 4각의 링은 붉은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고통스러운 장소다. 상대의 주먹을 여린 피부로 맞아 가며 격렬한 통증과 공포를 이겨 내야만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링에 오른다. 그들에게는 그곳이 생존의 터전이고 꿈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10대 소녀 복서들의 잇따른 투혼이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다.

12일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주니어플라이급 타이틀전에서 난타전 끝에 2차 방어에 성공한 김주희의 나이는 올해 19세 10개월. 그는 링 밖에서도 싸우고 있다.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는 가출했다. 병든 아버지를 월세방에서 모시며 살고 있는 소녀가장이다. 그래서 맨몸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권투를 택했다. 발톱이 빠지고 발바닥이 찢어지도록 산악달리기를 하며 체력 단련을 했다. 대전료로 받는 돈은 경기당 2000만∼3000만 원. 이 돈이 그의 인생을 로또복권처럼 한순간에 역전시킬 수는 없다. 1년에 한두 차례밖에는 방어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대박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을 최선을 다해 뛰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소녀 복서 손초롱은 같은 날 IFBA 미니멈급 챔피언에 오르며 김주희가 갖고 있던 세계 최연소 여자 챔피언의 기록을 갈아 치웠다. 그의 나이는 이제 겨우 18세 9개월. 그는 올해 초 타이틀매치를 벌이려다 무산되는 진통을 겪었다. 비인기종목인 여자 복싱에 스폰서가 붙지 않았고 IFBA 내부 사정까지 얽혔기 때문이다. 실망으로 슬럼프에 빠질 법도 했다. 그는 낙심하지 않았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결국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잡았다.

김주희가 헝그리 정신을 생활과 운동의 에너지로 삼아 왔다면 손초롱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낙관적인 태도로 난관을 이겨 냈다. 두 선수의 공통점은 쉽게 좌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링은 그들에게 고난의 장소가 아닌 영광의 무대가 되었다. 링 밖에서 그들을 지켜본 많은 사람에게 불굴의 정신력을 보여 준 소녀 복서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원홍 스포츠레저부 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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