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영]‘두산그룹 사태’ 그후

  • 입력 2005년 11월 1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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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는 독특한 왕위 계승 방식을 갖고 있다. 압둘 아지즈 초대 국왕에 이어 그의 아들 5명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다. 올해 8월 왕통을 이은 압둘라 국왕의 다음 차례도 역시 이복동생인 술탄 국방장관이다. 이어 나예프 내무장관, 살만 리야드 주지사 등 형제들이 줄을 서 있다.

사우디는 이런 방식으로도 왕위 계승 과정에서 별다른 진통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들 형제의 다음 세대로 왕위가 넘어가야 한다. 이때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길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국내 대기업 가운데 두산은 ‘사우디 방식’으로 그룹 총수를 이어 왔다. 1세대 박승직(朴承稷), 2세대 박두병(朴斗秉) 회장에 이어 3세대 형제간인 용곤(장남) 용오(2남) 용성(3남) 씨가 차례로 그룹 회장에 올랐다. 5남 용만 씨도 ㈜두산 부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별 일이 없었다면 총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4남 용현 씨는 서울대 의대 교수, 6남 용욱 씨만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두산그룹은 이처럼 형제들이 돌아가며 총수를 맡으면서도 잡음이 없는 인화를 자랑해 왔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구조조정에 성공해 맥주그룹에서 중공업그룹으로 순탄하게 변신해 모범적인 형제 경영 사례로 꼽혔다. 박용성 전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 여러 직함을 맡아 ‘재계의 쓴소리’라는 싫지 않은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4세대의 그룹 내 위치가 커지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두산 오너 가문의 4세대는 15명에 이른다. 그룹 승계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구조다.

지금 두산그룹이 처한 위기는 매출이나 순익이 줄어드는 기업실적 악화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룹을 규정짓는 핵심 정체성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형제간 이전투구로 ‘인화’ 이미지는 완전히 상실했다.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 혐의로 기소돼 도덕적으로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그룹의 얼굴 역할을 하던 박용성 전 회장의 활약도 기대할 수 없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졸지에 위기에 처한 만큼 다른 기업들은 여기에서 몇 가지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두산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패밀리 경영’을 해 왔지만 그러기에는 총수 집안의 지분이 너무 적다. 외국에서는 흔하지만 ‘패밀리 경영’을 하려면 안정적인 지분 확보가 필수적이다. 두산은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계열사 간 순환출자라는 고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고 계열사들의 자사주 비율도 비정상적으로 높다.

더 큰 문제는 총수의 집안싸움으로 기업이 흔들렸다는 점이다. 집안 문제와 기업이 연계되지 않도록 하는 ‘방화벽’이 두산에는 없었다. 기업이 크면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한다. 총수의 말 한마디로 탈법이 생길 수 있다면 그룹 내에 방화벽 기능이 생길 수 없다.

워낙 비상 상황이기도 하지만 두산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비상경영위원회를 구성하고 산하에 두 개의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혁신적인 지배구조 개선과 기업 투명성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이 두 가지야말로 이번 두산 사태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일단 방향은 제대로 잡은 셈이다.

문제는 실천 의지다. 유병택 비상경영위원장의 말대로 ‘혁신적 지배구조 체제를 확립하고 신뢰받는 기업으로 거듭난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상영 경제부장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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