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살의 필독서 50]<22>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입력 2005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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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박완서의 자서전적 소설이다. 이 작품은 시간적으로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스무 살 대학생이 되어 6·25전쟁의 한복판에 이르기까지를 담고 있다. 또 공간적으로는 작가의 고향인 개성 인근 박적골과 어려서 옮겨온 서울을 오간다. 시공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고전적 형식의 성장소설에 속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일인칭 화자 ‘나’의 육체적, 정신적 변화와 성숙을 그려 간다. 그 화자의 목소리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독자의 읽기는 일차적으로 완성되며, 이해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다.

그렇다고 어려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짧은 시간에 근대화를 경험한 우리 역사에서 반세기 조금 더 전이란 때로 캄캄한 어둠에 해당된다. 할아버지로부터 오빠에게로 이어지는 가부장적 질서는 그래도 좀 익숙한 등잔불이라고 치자. 하지만 재를 모아둔 곳에 배설을 하여 그것을 모아 퇴비로 쓰는 자연 친화적 ‘뒷간’은 벌써 저 너머의 다른 세상이다. 여기서 뒷간은 비록 그것이 똑같은 배설의 장소라 하더라도 오늘날의 화장실과는 전혀 다르다. 조금 과장하자면, 삶의 패러다임이, 감각과 인식의 틀이 서로 다른 것이다.

이 작품 속에는 그런 뒷간과 같은 저 너머의 기호들이 곳곳에 있다. ‘싱아’ 같은 풀과 나무와 냇가의 자연은 물론이고, 온갖 전통적 풍습과 음식에 이르기까지 그 기호들은 오늘날의 젊은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낯선 암호와도 같을 것이다. 어쩌면 애써 풀어야만 할 수수께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엄연한 삶이었다. 그 삶이 능숙한 이야기꾼의 솜씨를 타고 오늘의 우리에게로 이어진다. 우리 삶의 지층을 이루는 풍성한 기억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객관적 기호가 아니다. 그 기호와 기호 사이를 메우는 움직이는 사람들과 삶이다. 그리고 다양한 인물의 심리를 훤히 꿰뚫어 보는 작가의 시선이 따뜻한 이해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어렵고 힘든 시기의 삶이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것임을, 그러니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작가는 잘 알고 있다. 현실은 드러난 것만이 다가 아니며,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면이 있는 것이다. 친일과 냉전의 이데올로기 역시 마찬가지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저마다 광포한 시대의 희생자로서 자신들의 운명을 산 것뿐인데. 그러니 실제 역사적 사실이 잔인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감의 시선 속에서 포용되어야 할 우리 모두의 삶이다. 나는 그 따뜻한 시선을 작가의, 그리고 우리 문학의 성숙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으로 검증되지 않은 시대는 아직 역사가 아니다. 학문으로서의 역사는 존재하는 사실만을 다루지만, 문학은 존재할 수 있었던 모든 ‘상상적 사실’, 그렇기에 더욱 총체적인 사실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통해 비로소 우리 현대사의 한 시기가 살아 있는 영혼을 얻게 되었다. 이 영혼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이어진다. 그러니 이야기꾼이야말로 한 부족의 진정한 역사가라는 점에서 박완서는 뛰어난 작가이자 위대한 역사가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얼굴을 만나는 일, 그것은 우리 모두의 축복이다.

박철화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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