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싶은, 그러나 못잊을 '살인의 추억'

  • 입력 2005년 11월 11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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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효 끝나도 계속 추적”화성 연쇄살인 9차 사건의 공소시효 만료가 1주일도 남지 않았다. 형사들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형사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전담수사반인 화성경찰서 강력5팀의 안광헌 팀장이 수북이 쌓인 수사기록과 씨름하고 있다. 그는 “공소시효가 끝나도 끝까지 범인을 추적하겠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시효 끝나도 계속 추적”
화성 연쇄살인 9차 사건의 공소시효 만료가 1주일도 남지 않았다. 형사들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형사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전담수사반인 화성경찰서 강력5팀의 안광헌 팀장이 수북이 쌓인 수사기록과 씨름하고 있다. 그는 “공소시효가 끝나도 끝까지 범인을 추적하겠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국민에게는 공포와 의문, 경찰에게는 자괴감을 남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 같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1986년 9월 15일부터 1991년 4월 3일까지 4년 7개월간 10차례에 걸쳐 경기 화성시 태안읍을 중심으로 반경 3km 이내 지역에서 일어난 부녀자 강간살인 사건. 8차 사건만 범인이 잡혔을 뿐 나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9차 사건은 14일로, 마지막 10차 사건은 내년 4월 2일로 공소시효(15년)가 끝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를 연장하자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되기도 했다.》

▽수사기록 영구 보존=역대 강력사건 중 가장 많은 경찰력을 동원했지만 수사에는 아직 진전이 없다. 경찰 조사를 받은 3명이 자살하거나 숨졌다.

경찰이 화성에서 일어난 일련의 살인사건을 연쇄살인으로 규정하고 수사에 나선 것은 1986년 12월의 4차 사건 이후부터.

당시 경기도경찰국이 수사본부를 차린 뒤 연인원 205만 명의 경찰을 투입했다. 용의자와 참고인이 2만1280명에 이른다. 지문 대조 4만116명, 유전자(DNA) 분석 570명, 모발 감정 180명의 기록을 남겼다.


8차 사건(1988년 9월)을 계기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DNA 분석기법을 수사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음모에서 검출된 특정 중금속이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높다’는 분석 결과를 갖고 농기구 수리점에서 용접일을 하던 범인을 검거했다. ‘8차 사건’으로 부르지만 범행 수법으로 미뤄 연쇄살인과 관련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9차 사건과 10차 사건 현장에서 범인의 정액을 확보해 DNA 분석을 마쳤다. 지금도 화성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용의자의 DNA 샘플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보낸다.

▽화성 사건은 현재진행형?=연쇄살인사건의 영향으로 화성에서 성폭력이나 여성 살해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은 크게 긴장한다.

지난해 10월 봉담읍에서 실종됐다 살해된 여대생 노모(21) 씨 사건에는 연인원 2만 명의 경찰력을 동원하고 용의자 4700여 명의 DNA 샘플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보냈다.

화성경찰서 관계자는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사실이 명백해도 여성 시신이 화성에서 발견되면 몸이 떨린다”고 털어놓았다.

수사 기록은 캐비닛 5개 분량. 검찰과 경찰은 공소시효 만료 1년이 지나면 기록을 폐기하는 다른 사건과 달리 이 기록을 영구 보존키로 했다. 사건의 중대성과 국민적 관심을 감안하고 공소시효 이후라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현재는 화성경찰서의 강력팀이 사건을 맡아 가끔씩 들어오는 제보를 확인한다. 수사 과정에서 다른 범죄를 저지른 1495명을 적발했다.

2003년 개봉돼 500만 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살인의 추억’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풀리지 않는 의문=수사 담당자들은 피해자 모두 몸이 묶인 상태였고 강간당한 점으로 미뤄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흉악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을 못 느끼고 범행 자체를 즐기는 ‘사이코패스(psychopath)’의 소행으로 경찰은 판단한다.

영화 속 형사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하승균(河昇均) 경기경찰청 수사지도관은 “9차 사건의 피해자를 죽인 뒤 가슴을 바둑판처럼 면도날로 그은 잔인하고 난잡한 수법으로 볼 때 범죄를 즐기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범죄”라고 말했다.

연쇄살인 사건은 팔탄면의 7차 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도 1호선을 끼고 태안읍 반경 3km 이내에서 일어났다. 대부분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태안읍과 정남면 일부에는 도로와 논밭 일부가 남아 있다.

지난해 노 씨가 살해된 사건 이후 불안감이 높아지자 화성시는 이곳을 중심으로 3년간 방범용 폐쇄회로 TV 165대를 설치하기로 했다.

최원일(崔元一) 화성경찰서장은 “공소시효와 상관없이 끝까지 추적해 진실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화성=남경현 기자 bibulus@donga.com

■ 1970~2005 연쇄살인 분석

한국에서 발생한 연쇄살인의 절반 이상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는 달리 사회적 불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드러났다. 사회적 불만을 가진 20대 남성이 흉기를 이용해 밤(8∼12시)에 피해자 집에 들어가 20대 여성을 살해하는 것이 한국의 전형적인 연쇄살인 형태다.

이는 본보 취재팀이 1970년부터 올해까지 발생한 주요 연쇄살인 사건 20건을 분석한 결과다. 본보는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임준태(林俊泰) 교수에게 자문해 2명 이상을 시간적 간격을 두고 살해한 연쇄살인 사건만을 분석했다.

이 기간에 발생한 주요 연쇄살인 사건은 1975년 17명을 살해한 김대두 사건부터 1987년 김선자 연쇄독극물 사건, 아직 해결되지 않은 1992년 대천 어린이 유괴 사건, 지난해 유영철 사건 등이다.

한국 연쇄살인범 26명 가운데 50%인 13명이 사회적 불만을 주된 범행 동기로 꼽았다. 이어 경제적인 목적이 9명, 성적인 이유가 7명이었다.

천안대 경찰행정학과 김상균(金相均) 교수는 “미국 영국 등지에서는 성적인 이유가 주요 범행 동기로 나타나고 있지만 사회적 불만이 주요 동기인 한국 사회는 그만큼 사회적 갈등이 심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국에선 가해자의 진술만으로 범행 동기를 파악하는 경우가 많아 범인이 범행을 사회적 불만으로 정당화하는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남성 피해자의 비율이 외국보다 높은 편이며 성적인 이유로 인한 범행이 아니어서 여성 피해자의 연령도 40대 이상이 많은 것이 한국적인 특징”이라고 말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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