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0년 스티브 매퀸 사망

  • 입력 2005년 11월 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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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어디에도 자유는 없어.”

남미 프랑스령 외딴섬 기아나. 탈출 시도와 독방 수용을 쳇바퀴처럼 오가는 생활에 지친 드가는 마침내 현실을 받아들인다.

“…….”

짧은 침묵, 긴 여운. 빠삐용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말없이 마지막 포옹을 하고 다시 심해를 향해 몸을 던진다.

“이놈들아, 나 여기 있다.”

영화 빠삐용(1973년)으로 배우로서는 물론 인생의 절정에 올랐던 스티브 매퀸.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쿨한 사나이(King of the Cool)’란 찬사를 들었던 그는 불과 몇 년 뒤인 1980년 11월 7일 폐암으로 사망한다.

나이 50세.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로 한창 활약할 때가 55세 안팎이었고, 숀 코너리가 아직도 건재한 것을 보면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아쉬움이 몰려온다.

매퀸은 인생이 바로 영화 그 자체인 배우였다. 목숨을 건 질주를 즐기는 스피드광이었고 한곳에 안주하지 못하는 세기의 반항아였다.

기존 터프가이들과는 달리 항상 단정하게 깎은 짧은 머리였지만 강렬한 눈동자와 절제된 표정 연기로 상대를 빨아들였다.

이런 매퀸의 기질은 그의 성장사를 살펴보면 이해가 된다. 어린 나이에 임신한 어머니와 마지못해 결혼한 아버지. 아버지는 곧바로 집을 나갔고 어머니도 어린 아들을 시골 오빠에게 맡긴 채 떠나버렸다.

매퀸 역시 중학교 때 가출해서 안 해본 것이 없는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폴 뉴먼을 평생의 라이벌로 생각했다. 예일대 출신의 엘리트 꽃미남인 뉴먼은 데뷔와 동시에 주연으로 발탁됐고 매퀸은 이 영화에 엑스트라로 이름을 올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매퀸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집념을 대탈주(1963년), 블리트(1968년),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1968년), 겟어웨이(1973년) 등을 거쳐 빠삐용으로 완성한다.

마침내 이듬해 타워링(1974년)에선 공동 주연한 뉴먼보다 영화 포스터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감격을 맛봤다.

자동차, 술, 담배, 마약, 여자, 로큰롤에 빠졌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고함을 질러대던 매퀸. 그의 유해는 소원대로 태평양에 뿌려졌다.

장환수 기자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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