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어문계 동기30명 졸업반되니 10명이 轉科”

  • 입력 2005년 11월 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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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생 김모(24) 씨는 3학년 때 인문대의 한 학과에서 전과(轉科)했다. 김 씨는 “내가 입학한 학과를 졸업해선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가 힘들다”면서 “그 학과의 입학 동기생 30명 가운데 10명 가까이 전과했다”고 말했다. 김 씨처럼 인문학에서 ‘탈출’하려는 대학생이 줄을 잇고 있다. 2002년부터 4년간 서울 시내 4년제 대학의 전과 현황을 살펴보면 인문대생의 전출이 전입보다 2∼8배 많았다. 이는 실용학문 분야인 경영대의 전입이 전출보다 5∼18배 많은 것과 대조를 이룬다. 》

이화여대 사학과에서는 이 기간에 15명이 전출했지만 전입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동국대 철학과에서는 19명이 빠져나가고 한 명만 전입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른바 문사철(문학 사학 철학) 중심의 ‘인문학 엑소더스(대탈출)’가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각 대학 인문대는 실용성을 강화하는 자구책 마련에 분주하다.

본보가 입수한 교육인적자원부의 2005년 대학특성화사업 가운데 ‘인문 분야’에 선정된 8개 대학의 사업서에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졸업생의 진로를 넓히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2008년까지 4년 장기 과제인 이 사업에 25개 대학이 신청해 8개 대학이 선정됐다.

▽지역학이 뜬다=인천대 국문과 학생들은 올 겨울방학 때 대부도에서 ‘서해 도서 방언’과 ‘서해 도서 구비전승자료’를 조사할 예정이다. 이는 2007년 연계전공으로 신설될 ‘인천학’의 첫 사업이다. 인천대는 물류기지인 ‘인천’과 ‘중국’ ‘화교’의 연구에 ‘인천학’의 초점을 맞추고 ‘중국·화교 연구센터’도 설립할 예정이다.

각 대학 어문학부는 지역학으로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다.

경희대는 ‘한국어문화’ ‘한국어와 경영’ ‘한국어와 태권도’ ‘한국어와 지역학’ 프로그램을 외국인 학생을 위해 제공하는 ‘한국학’ 개설을 준비하고 있다. 서강대는 ‘미국학’을 신설할 예정이며 연세대도 ‘동아시아학’을 마련하고 있다.

▽모든 학문은 인문학으로 통한다=모든 전공의 기초가 되는 인문학을 다른 전공과 연계하는 시도도 활발하다.

동국대는 ‘문화공학’ ‘문화경영학’ ‘문화학’을 연계전공으로 신설한 뒤 2008년 사업이 끝날 때 ‘문화학부’를 만들 예정이다. 인력 수요가 많아질 문화행사 기획이나 상품 관련 인재를 배출할 계획이다.

한양대는 자연과학과 법, 경제, 정보통신을 연계해 ‘과학기술인문학’ ‘공공수행인문학’ ‘문화경제인문학’ ‘커뮤니케이션인문학’ 등을 신설할 예정이다. 한양대는 취직을 원하는 학생에게는 인턴 기회를 제공하는 현장수행형 등 진로에 따른 맞춤식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고전 수업 강화=서강대는 2001년부터 매주 인문학부 교수들이 모여 ‘인문학 발전 방향’에 대해 토의했다. 이들은 ‘깊이 있는 고전학 연구’로 인문학 엘리트를 육성하기로 했다. 서강대는 내년 1학기부터 ‘현대인문세미나’ ‘동서 고전 세미나’를 문과대 필수과목으로 개설할 예정이다.

서울대도 5명 이내의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고전을 원어로 읽고 연구하는 ‘소그룹 고전원전읽기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 등 26개 강의가 다음 학기부터 실시될 예정이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美-英, 공공-민간재단 설립 아낌없는 지원▼

■ 외국의 ‘인문학 살리기’

‘인문학의 위기’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구조조정 과정에서 인문학 학과를 폐지하는 대학이 속출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도 1980년대 이후 ‘인문학 위기론’이 대두됐다.

하지만 이들 국가는 인문학 육성을 위한 정부의 시스템과 민간 재단이 한국에 비해 잘 갖춰진 편이다.

미국은 ‘국민인문예술지원법’에 따라 1965년 ‘국립인문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이 신청한 내년 예산은 1억3000만 달러(약 1300억 원).

이 재단은 ‘인문학 연구’ ‘박물관·문화원 지원’ ‘청소년 역사교육’ 등 38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또 미국에는 전공이 다른 인문학 교수들의 학제(學際) 간의 연구를 지원하는 민간 재단이 적지 않다.

영국도 ‘인문·예술연구지원회의’를 만들어 장기 연구를 지원하고 우수한 대학원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

한국 인문학자들의 숙원은 인문학을 체계적으로 연구·지원할 수 있는 재단을 만드는 것. 국무총리 산하 ‘경제·사회인문연구회’는 인문학 육성 정책에 대한 자문기관이며 인문학 연구비를 지원하는 ‘학술진흥재단’은 단발성 연구 지원에도 벅찰 정도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추진 중인 ‘인문연구진흥법’(가칭)에는 ‘한국인문연구진흥원’을 사단법인체로 만들어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정부 및 연구기관과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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