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승련]美 ‘가난과 비만’ 악순환

  • 입력 2005년 11월 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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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워싱턴에서 취재를 시작한 이후 고속도로변 ‘대중식당’을 들를 때마다 ‘뱃살과 소득에는 상관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식당을 가득 메운 남자 손님의 평균 허리둘레가 최소한 40인치는 됨직해 보인 탓이다. 예외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소득이 낮을수록 뚱뚱하다는 명제가 성립 가능해 보였다. ‘체형 편견’이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굳이 말한다면 말이다.

그 후에도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자정 이후 TV는 운동기구와 살 빼는 약 광고에 점령된다. 같은 광고가 1년 이상 이어지는 걸 보면 물건이 꽤 팔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건강기구의 홍수 속에서 비만 또는 과체중자가 넘쳐 나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국 비만협회의 2001년 조사는 “미국인의 28%는 과체중이고 34%는 비만 상태”라고 밝히고 있다. 신장 162cm의 여성을 기준으로 설명한다면 66∼79kg이 28%, 79kg 이상이 34%다. 한국에서는 79kg 이상이 4∼5% 선이다.

올해 9월 초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 현장에서 만난 뉴올리언스 도시 빈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 만났던 ‘굶주린 계층’에는 뚱뚱한 사람이 참 많았다.

한 유명 패스트푸드 회사의 미국 내 이미지가 한국에서와는 다르다는 것도 발견했다. 1988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처음 등장했을 때 강남문화의 코드로 여겨지던 그곳이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저소득층 식당으로 간주돼 왔다. 물론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도 가끔씩 즐기기는 하지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가는 과정에서 비만, 특히 어린이 비만에는 저소득층의 시간부족, 돈 부족이라는 경제적 요인이 작용한다는 ‘작은 결론’에 도달했다.

미국만의 일은 아니겠지만 미국의 일하는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정성껏 식사준비를 해 주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TV 광고를 보면 그렇다. 한 끼를 4달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패스트푸드 식당에 자녀들을 데리고 가거나 통조림 및 냉동식품을 전자레인지로 조리해 간편하게 먹는 광고 장면은 아주 익숙하다.

그런데 이런 TV 광고 모델은 십중팔구 백인이 아닌 흑인이다. 식품회사의 주 타깃 고객이 누구인지가 자명해진다.

영화에서도 이런 현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여주인공은 이런 말을 했다. “엄마는 120kg이어서 몇 걸음 걷기조차 힘들고 언니는 죽은 아들의 사망신고를 미루면서 복지 혜택을 받고 있고….” 자신이 권투를 해야 하는 이유를 지긋지긋한 가난 탈출이라고 설명하는 장면에서였다. 시나리오 작가도 비만과 가난의 상관관계를 무의식중에 그려 낸 것으로 느껴졌다.

살찐 책임 소재는 늘 논란거리다. 보수주의자는 개인의 노력 부족을 탓하고 진보주의자는 학교 급식에 침투한 식품회사의 이기심이 아이들의 건강을 해친다고 말한다.

분명한 것은 비만이 늘어나고 있다는 조사 결과다. 예일대 켈리 브라우넬 영양학 교수는 “저소득층이 어려서부터 영양가 낮고 칼로리만 높은 식품을 대거 섭취하게 만드는 구조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건강한 몸, 한발 더 나아가 육체적 섹시함이 권력이란 속설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말이다.

이런 현상이 비만 사회 미국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겁기만 하다. 저소득층은 증가하고 근로 조건 악화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자녀를 위해 식단을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부족해지고…. 이렇게 삶의 조건이 악화하면서 건강한 육체와 품위 있는 삶에 대한 의지도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잘 관리된 몸이냐, 방치된 몸이냐.” 몸의 정치경제학은 날로 양극화되어 가는 미국 사회의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키워드다.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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