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문홍]한국이 ‘창조적 해결사’ 되려면

  • 입력 2005년 11월 3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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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6자회담 때 한국은 ‘중재자(mediator)’ 또는 ‘대화 촉진자(facilitator)’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다음 번 회담에서 한국이 감당할 일은 ‘창조적 해결사(creative solver)’의 역할이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대북(對北)정책을 진두지휘했던 한 전직 장관의 말이다. 그는 9월 4차 6자회담 참가국 중 가장 빛나는 역할을 해낸 것은 한국이라고 강조했다.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조율 작업을 한 것은 한국과 중국이었지만, 그중 한국의 막후 역할이 더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조만간 5차 6자회담 개최가 확실시되고 있다. 지난번 6자회담에서 북한 핵 포기 원칙에 합의한 만큼 이번 회담은 핵 포기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논의하는 자리다. 다시 말해 북한의 핵 포기 수순(手順)과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협상이다. 지난달 27일 한성렬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가 “경수로 완공 전에는 핵을 해체할 수 없다”고 밝히자 30일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미 측 수석대표는 “용납할 수 없다”고 맞받아쳤다. 앞으로 협상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복잡한 실타래를 푸는 ‘창조적 해결사’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은 옳다. 북-미는 양대 대립 축이고,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다. 러시아와 일본은 6자회담 무대에서 조연급일 뿐이다. 그렇다면 북핵 위기의 직접 당사자인 한국이 적극 나설 수밖에 없다.

한국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한국의 ‘창조적 해결사’ 역할은 북-미 양측의 전적인 신뢰 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미국과 북한이 한국을 믿을 만한 상대로 인정해 줄 때 한국이 내놓는 중재안이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 과연 그런 상태인가.

남북관계가 상호 신뢰의 기반을 쌓아 가고 있는지 여부는 저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으므로 여기선 논외로 하자. 문제는 한미 사이의 신뢰다. 북한에 대해 상대적으로 긍정적이던 미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상원 의원, 지한파(知韓派)에 속하는 스티븐 보즈워스 전 주한 대사까지 한미관계를 우려하는 대열에 선 것은 한미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증거다. 양측 정부 모두 겉으론 동맹관계에 이상이 없다고 말하지만, 과거처럼 ‘혈맹(血盟)’으로 표현될 만한 유대감은 거의 사라졌다는 게 중론이다.

과거 한미관계를 흔들고 이간질하던 주체는 북한이었다. 그러나 최근엔 한국 정부 스스로가 한미 간 유대를 의심케 하는 행동을 종종 보인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가 비근한 예다. 한미는 지난달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협상을 ‘적절히 가속화’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주일 뒤 정부 당국자는 “2015년 이내”라고 기한을 못 박았다. 미국과 사전 협의라도 하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던져 놓고 보자는 것인지, 우리도 어리둥절한데 미국은 어떻겠는가.

한미관계가 느슨한 것처럼 보일 때 주변국들은 한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해 상하이에서 만난 한 중국인 한반도 전문가가 사석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한국이 왜 자꾸만 중국에 가까워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있을 때 더 존중받을 수 있는데….” 이번 5차 6자회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미국과 함께할 때 한국의 영향력도 발언권도 더 커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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