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승철]‘경제 대통령’이 안보인다

  • 입력 2005년 11월 2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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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는 대통령이 2명 있다”는 말을 듣곤 한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흔히 ‘경제 대통령’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은 말 한마디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했다는 점에서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슨 신통력을 지닌 인물은 아니다. 18년간 재임하며 신망을 얻은 이유는 시장을 존중했다는 점 때문이다. 정부가 민간 경제에 가급적 개입하지 못하도록 애썼다. 그 결과 미국 경제는 역사상 최고이자 최장기 호황을 누렸다.

최근 차기 FRB 의장으로 내정된 벤 버냉키 박사도 그린스펀 의장처럼 시장에서 오래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일단 ‘세계 금융의 심장부’인 월가(街)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버냉키 박사를 그린스펀 의장의 닮은꼴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한때 대통령이 2명 있었다. 1980년대 초 전두환 대통령이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말한 데서 비롯된 농반진반(弄半眞半) 상황이었다.

‘한국의 경제 대통령’ 김 수석비서관은 시장 원리를 철저히 믿었다. 그는 자율, 개방의 중요성을 외치며 실천해 나갔다. 미래를 위한 청사진도 그렸다. 한국이 오늘날 정보기술(IT) 강국이 된 것도 김 수석비서관의 통찰력으로 미리 투자를 확대해 놓은 덕분이기도 하다.

한국의 개발연대엔 ‘경제 대통령’급은 아니라 하더라도 리더십과 비전을 지닌 경제부총리들이 있었다. 남덕우, 이한빈 박사가 그들이다. 이상(理想)을 품은 그들은 현실의 벽 앞에서 고뇌했지만 실사구시 원칙에 따라 정책을 풀어 나간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관치(官治)가 많았긴 하지만….

오늘날은 어떤가. 좋은 의미에서의 경제 대통령이 보이지 않는다. 성장 잠재력 감소, 투자 의욕 저하, 노사 갈등, 일자리 부족 등 산적한 골칫거리들을 풀어 나갈 지휘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경제가 어려우면 “대통령이 민생에, 경제 문제 해결에 다걸기(올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럴 때면 걱정스럽다. 대통령이 정말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이런저런 경제 정책에 관여하지나 않을까 해서다. 민생을 챙기라는 요구를 시장 개입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크다. 기업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국민의 혈세와 국채 발행으로 마련한 돈으로 공공사업을 늘리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운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경제 대통령 활동을 한다면 한국 경제는 악순환에 빠진다. ‘정부의 실패’가 생길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시장의 실패’를 막는답시고 아마추어적 식견으로 민간에 대해 관권(官權)의 칼을 휘두른다면 ‘선진 한국’은 더욱 멀어질 것이다.

10·26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여당의 참패로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에 흠이 가자 이해찬 국무총리에게 국정 운영의 힘이 더욱 실린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 총리는 10월 30일 경제단체장들과 골프 모임을 가진 데 이어 경제인들과 잇단 회동을 추진한다고 한다. 경제 챙기기에 나섰다는 신호탄으로 보인다.

재계 인사들이 총리를 만난다고 투자 의욕이 살아날까. 고압적인 분위기로 투자를 강요한다면 투자 심리는 더욱 얼어붙지 않을까.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에게도 뻣뻣하다는 이 총리가 계급장 없는 민간인 재계 인사들을 부드러운 눈길로 대할까.

대통령, 국무총리, 경제부총리 가운데 누가 경제 대통령 역할을 맡든 시장 존중 원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부의 그 막강한 권력으로, 역설적이지만, 권력을 줄이는 데 힘을 써야 할 것이다. 경제 대통령이 민간에 대한 정부의 온갖 규제를 절반 정도로 줄였다고 치자. 그러면 민간 경제는 확연히 살아날 것이고 그는 훌륭한 경제 대통령으로 청사(靑史)에 이름을 길이 빛내리라.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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