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이념의 극단’을 유머로 녹이는 시민

  • 입력 2005년 11월 2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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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정보기술(IT) 기업 인텔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앤드루 그로브의 자서전 ‘위대한 수업’에 6·25전쟁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그는 당시 16세의 학생으로 공산당 치하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살았다.

‘미국의 꼭두각시인 남한 군대가 북한을 침공했다고 한다. 학교와 일터에서 토론이 열렸고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는 시위를 권고받았다. (이후 북한이 신속하게 남쪽으로 밀고 내려간 전황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기습을 당한 북한이 그렇게 빨리 물리칠 수 있을까. 2차 대전에서 독일이 남한보다 작은 헝가리에서 쫓겨나기까지 세 달이 걸리지 않았던가! 의문을 친구인 가비한테 털어놓았다. 가비는 소문과 달리 공격한 건 북한일 수도 있다고 했다. 비밀경찰본부 앞을 지나던 우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6·25전쟁 때문에 동유럽에서 일어난 일이 냉전 코미디의 한 토막 같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로브의 의문이다. 간단한 상식만으로 그는 전쟁의 본질에 다가갔다. 55년이 지난 한국에서 이 문제로 논란이 빚어졌다는 것을 그가 알면 뭐라고 할지.

강정구 교수가 “6·25는 통일전쟁”이라고 한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탄탄한 기초를 보여 준다. 강 교수의 주장에 대해 ‘수구’라고 하는 좌파도 있었다. 기자가 인터뷰한 대학생들도 “누가 받아들이겠느냐”고 한목소리를 냈다. 임우선(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씨는 “친구들도 황당하다며 화제로 삼지 않는다”고 말했다. 동국대의 한 교수도 “우리 대학에 670여 명의 교수가 있지만 얼마나 공감하겠느냐”며 웃었다.

이를 보면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과 한나라당의 정체성 논란, 언론을 통한 논쟁이 생산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상식을 가진 시민들이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주장이라고 웃어넘겼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념의 지배를 위해 정파적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의 시민이 아니라,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고 보편 가치를 추구하는 일상의 시민이다.

그래서 강 교수의 주장은 실정법 위반 여부보다 안타까움의 대상으로 보인다. 표현의 자유에 앞서, 치밀하지 못한 낡은 주장의 반복에 대한 아쉬움….

우리 사회는 때늦게 이념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다.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서 벌어지는 집회 현장의 가운데에 있다가 기자도 섬뜩한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졌던 것은 물리적 충돌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리적 폭력을 자행하는 집단이나 핏발 선 막말은 그 자체로 눈총을 받았다. 그것이 곧 시민의 성숙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한 원로 교수는 “우리가 30∼40년 만에 이룬 산업화는 유럽에서 수백 년이 걸렸고 그 시민 사회들은 모두 야만의 시대를 거쳤다”며 “그러나 교육과 민주화 수준으로 미뤄 보면 우리 시민 사회는 산업화 못지않게 빠르게 성숙할 것 같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후 가속화한 전문 사무직의 확장, 정치권의 궤변을 질타하는 유권자, 새로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에 몰린 인파, 이념보다 실용의 세계관을 가진 대학생, 봉사의 기쁨을 아는 청소년은 성숙의 지표로 볼 만하다. 이를 모르고 선도투쟁론에 매몰돼 극단(極端)의 주장만 외치면, 좌든 우든 코미디의 소재가 될 것이다. 성숙한 시민은 극단을 유머로 녹인다.

허엽 위크엔드 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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