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1등 향해달렸는데…박수소리 없는 오늘…

  • 입력 2005년 11월 2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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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갖고 기다립시다. 자세를 낮추고 겸손하도록 노력합시다.”

최근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에서 일하는 모든 임원은 그룹 고위인사가 보낸 이런 내용의 e메일을 받았다. A상무는 “메시지를 보면서 우리 그룹이 처해 있는 어려운 상황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이른바 ‘X파일 사건’ 등 잇따른 악재에 시달리는 삼성 수뇌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그룹 안에서는 “사회 곳곳에서 ‘삼성 때리기’가 나타나는 반면 우리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는 분위기는 찾기 드물다”는 탄식이 나온다. 그동안 ‘실적 제일주의’를 앞세워 매진하는 과정에서 잠재적 우군(友軍)마저 등을 돌리게 했다는 자성도 적지 않다.

○ 삼성의 불안과 반성

그룹 간판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36번째 창립기념일인 1일. 지난해 사상 최고의 실적을 내고 떠들썩했던 분위기와 비교하면 영 딴판이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31일 경기 수원시 사업장에서 1400여 명의 임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기념식만 가졌다. 삼성전자 창립기념일에 맞춰 생일잔치를 하던 그룹 구조본도 1일 팀별로 나눠 청계산 등을 오른 뒤 점심때 직원들과 막걸리 파티를 갖는 정도였다.

“10여 년 전 일을 지금 들춰내 삼성 때리기를 하는 게 경영엔 큰 부담입니다. 당시엔 불법이 아니었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기업을 바라보는 잣대가 더 엄격해져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나타났지요.” 삼성의 한 임원은 이렇게 고충을 털어놨다.

삼성은 최근 임직원들에게 ‘외부에 대한 공손한 태도’를 부쩍 강조한다. 최근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여론의 무서움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외부 시선이 따가워진 데는 1등 기업에 대한 경계감뿐 아니라 그동안 삼성 임직원들에게 은연중 나타났던 우월의식과 자만감도 한몫했다고 봅니다.”(삼성 구조본의 한 임원)

삼성이 최대한 자세를 낮출 것을 강조하는 것도 종전처럼 ‘오만한 삼성’으로 비쳐서는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그룹 고위층에선 “삼성이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외부와의 소통(疏通)을 제대로 하지 못한 실책이 없지 않았다”는 얘기도 나온다.

○ 사회 공헌 늘리지만 핵심 현안은 원칙대로

그룹 수뇌부의 또 다른 고민은 ‘1등 삼성’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10년 후에도 삼성이 계속 1등을 지킬 수 있을지, 대박을 터뜨린 반도체가 그때도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남아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이라는 것.

최근 일각에서 나온 ‘삼성공화국’이나 ‘삼성의 나라’라는 비판에 대해 한 사장급 임원은 “앞으로 경영환경의 불투명성에다 요즘 얻어맞는 것까지 감안하면 공화국이 아니라 구청쯤 되는 것 아니냐”는 뼈 있는 농담을 했다.

삼성은 몸을 최대한 낮추더라도 공정거래법 헌법소원 취소 등 정치적 타협에는 나서지 않을 방침이다. 현재로서는 난국을 타개할 뾰족한 해법이 없기도 하지만 정치적 흥정으로는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삼성은 그룹 내부에서 위헌이라고 판단하는 공정거래법 문제는 헌법소원 결과를 지켜본다는 생각이다. 또 기업지배구조를 공격하는 외부 움직임에는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강조한다.

다만 중소기업과의 상생경영을 실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사회공헌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 이미지를 바꾼다는 계획이다. 돈을 많이 벌어 세금을 제대로 내고 고용 창출에 앞장서면 반(反)삼성 분위기도 다소 누그러지지 않겠느냐고 기대한다. 달라진 시대에 맞춰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정도(正道)경영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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