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싶은 남자들]<2>자식, 등 돌린 애물단지

  • 입력 2005년 8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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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병원 홍보팀장인 박모(47) 씨는 3년 전 퇴직금을 중간 정산해 1억2000만 원을 받았다.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적금 등 재테크를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둘째 유학 보냅시다.” 아이들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박 씨를 쳐다봤다. 결국 2003년 12월 초등학교 4학년짜리 둘째와 아내를 캐나다 토론토로 보냈다.》

그때부터 시작된 ‘기러기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큰딸(현재 고2)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애 딸린 홀아비’의 고충을 이해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미 둘째 조기유학에 퇴직금의 절반인 6000만 원을 썼다. 나머지 6000만 원도 큰딸의 대학 입학 후 해외연수를 약속했기 때문에 사실상 ‘저당’ 잡힌 상태.

“3년 전 아내와 아이들의 시선이 잊혀지지 않아요. 말은 안 했지만 ‘자신의 편안한 노후를 위해 자식의 미래는 망쳐도 개의치 않는 아빠가 아니냐’고 따지는 것 같았어요. 그런 상황에서 노후보장 적금이 가당하기나 합니까?”

우리 사회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평생 애프터서비스’ 제도가 있다. 자식에 대한 무제한의 뒷바라지 의무가 그것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챙길라치면 ‘이기적인 아빠’란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게 이 나라 ‘보통 아빠’들의 현주소다.

최근 ‘비동거 가족경험-기러기 아빠를 중심으로’란 박사논문을 발표한 연세대 대학원 최양숙(崔亮淑) 씨는 “한국 사회엔 성장한 자녀가 독립하는 시스템이 결여돼 있다”며 “가장에게 평생 자식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이 주어지는,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 가족문화”라고 설명했다.

자녀가 고교만 졸업하면 자립하는 게 당연시되는 서구의 기준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미 어른이 된 자식 뒷바라지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다.

택시운전사 이모(48) 씨는 대학 1년을 휴학하고 군복무 중인 아들을 얼마 전 면회하고 온 뒤 걱정이 늘었다. 이제 한시름 놨나 싶었는데 아들 녀석이 10월에 제대하면 전공을 바꾸기 위해 대학입시를 다시 보겠다고 ‘통보’한 것. 게다가 고3인 딸은 “대학에 들어간 뒤 1년간 해외연수를 시켜주지 않으면 공부를 안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일단 “그렇게 하자”고 말했지만 그 비용을 어떻게 댈지 막막하기만 하다.

인제대 서울백병원 신경정신과 우종민(禹鍾敏) 교수는 “심리적으로 가장과 자식이 상호의존적인 상태에서 가장의 재정적 뒷바라지를 서로가 ‘애정의 증표’로 착각하곤 한다”며 “이런 관계가 지속되면 자식이 성장한 뒤에도 아버지에게 의존하는 걸 당연시하게 된다”고 말했다.

물론 대다수 아버지는 그 같은 무제한의 애프터서비스를 ‘행복한 희생’이라고 여기며 기꺼이 감수하는 분위기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위한 헌신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들을 정작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식 뒷바라지에 휘는 등뼈가 아니다. 최근 들어 가족간의 끈이 급격히 약해지고 개인주의가 팽배하면서 자녀들은 갈수록 아버지에게 냉랭하고 계산적으로 되고 있다.

재정적으론 아버지에게 계속 의존하면서도 그 밖의 문제에선 자신의 영역에 아버지가 끼어들 여지를 거의 남겨 두지 않는 것이다. 예전의 아버지들은 자식에 대한 헌신의 대가로 그래도 밀접한 부자·부녀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중년 남성들에겐 헌신만 요구될 뿐이다.

1남 1녀를 둔 최모(58) 씨는 요즘 자식들에게서 ‘왕따’ 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년 전 아들이 결혼할 때 ‘1년만 같이 살다 독립하면 어떻겠느냐’고 운을 떼려다 씨도 먹히지 않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해달라는 건 다해 주며 키운 아들이었다.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어학연수에 대학원까지 보내줬는데…. 최 씨는 서운한 마음을 누르고 빚을 얻어 아들의 신혼살림집 전세금과 혼수를 마련해 줬다. 하지만 같은 서울에 사는 아들 부부는 특별히 부모와의 사이가 나쁘지 않은데도 두세 달에 한 번밖에 얼굴을 안 보여 준다. 2세 출산 계획에 대해 충고하려다 얼음장같이 차가워지는 며느리의 얼굴에 ‘다 알아서 할 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쓰여 있는 듯해 입을 다물고 만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이 들면서 자기 주장이 세진 아내와 갈등을 빚는 일이 잦아지자 딸은 엄마가 안쓰러운지 아빠에겐 아예 말도 걸지 않는다. 요즘 최 씨는 이미 여러 세대 전부터 수많은 아버지가 했던 의미 없는 푸념을 되풀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품 안의 자식이지, 다 필요 없어….”

동국대 사회학과 조은(曺恩) 교수는 “한국 가족은 외형만 근대적이지 실제로는 가족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선 정립된 가치가 없는 상태”라며 “사회 전체적으로 자라나는 세대에 자립심을 키워주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권준수(權俊壽) 교수도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자립심을 키워줘서 성인이 되면 홀로 서도록 해야 한다”며 “아버지가 무한 책임이라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때 아내 및 자녀들과 민주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땅의 상당수 아버지는 ‘다 필요 없다’는 그 자식을 위한 메아리 없는 희생을 계속할 것임에 틀림없다.

“썰렁한 집안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가족은 같이 살아야죠. 기러기 생활을 했다가는 금세 가족이 공중분해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홍보대행사 임원인 김모(44) 씨는 요즘 기러기 아빠가 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아내가 초등학교 5학년, 3학년인 두 딸의 조기 유학 얘기를 꺼낸 것은 지난해. 김 씨가 계산해 본 결과 매년 1억 원 이상의 돈이 필요했다. 돈도 돈이지만 기러기 생활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렇지만 김 씨는 머잖아 자신이 뜻을 굽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유학 비용은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을 계획이다. “자식 이기는 아버지 있습니까?”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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