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조헌주/에베레스트만큼 높은 네팔인 자긍심

  • 입력 2005년 8월 29일 03시 07분


코멘트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50m)를 비롯해 8000m 이상 고봉 14좌가 즐비한 ‘세계의 지붕’ 네팔에서 며칠간 휴가를 보냈다. 우기인지라 히말라야의 웅자를 다 볼 수는 없었지만 날이 걷힐 때 구름 위로 홀연히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비치는 신비로운 설산(雪山)만으로도 가슴은 마구 뛰었다.

셰르파로서 한국 산악계에 널리 알려진 앙 노르지가 경영하는 한국식당 ‘빌라 에베레스트’를 찾아 23일 수도 카트만두 시내를 차로 돌아다닐 때였다. 왕궁 앞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차량 행렬이 시위대에 막혔다. 수백 명의 대학생이 행진하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자 벽돌을 깨서 던졌다. 요란하게 이어지는 최루탄 발사음, 매캐한 연기, 흩어지는 시위대…. 순간 1970년대 유신독재, 1980년대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 시위로 어수선했던 한국 대학가의 풍경이 떠올랐다.

시위대 구호는 석유 제품가 인상 반대였다. 올해 2월 의회를 해산한 뒤 권력을 독점한 국왕에 대한 항의가 배경에 있다고 현지인들은 설명했다. 국왕과 야당, 대학생, 언론인들의 대결이 점점 격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의미 있는 다당제 민주주의만이 국민에 의한 정부를 실현하는 효과적 수단이다.’

네팔 공보부가 시내 곳곳에 세워놓은 영어 푯말의 핵심은 갸넨드라 국왕의 ‘네팔식 민주주의론’이다. 한국식 민주주의를 주창하던 유신독재하의 구호와 흡사하다.

최근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아시아·태평양 최저 개발 14개국의 평균 1인당 국민소득은 513달러. 네팔은 233달러로 그중에서도 최빈국이다.

네팔은 공산혁명을 추구하는 ‘마오이스트(마오쩌둥주의자)’ 반군과의 내전 때문에 더욱 엄혹한 상황에 처해 있다. 공산반군 활동이 아이로니컬하게도 반공을 앞세운 국왕의 독재 강화로 한층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체재 중인 며칠 새에도 지방에서 반군이 설치한 지뢰가 폭발해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5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

갸넨드라 국왕은 2001년 왕위에 오를 때부터 국왕이던 친형 일가족 집단 살해극의 배후로 의심받았다. 물론 공식적인 범인은 당시의 왕세자. 국민감정이 좋지 않은 인도 출신 여성과의 결혼을 왕가에서 반대하자 왕실 모임에 참석한 왕족 9명을 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것이 공식 발표다. 하지만 현 국왕은 당시 모임에 불참했고 현 국왕의 아들도 살아남아 의혹은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국민을 내세우고, 반공을 기치로 의회를 해산했지만 권력욕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고 네팔 현지 지식인들은 비판하고 있다. 인류사를 통해 권력 찬탈의 비정함과 상실의 무상함을 수없이 보아 왔건만 거기에 빠져들어 허우적대는 인간의 모습이 가련할 뿐이다.

네팔은 다신교인 힌두교를 국교로 삼고 있다. 하지만 네팔은 중국의 탄압으로 망명해 온 티베트 불교 승려와 수십만 명의 난민을 껴안고 있다. 카드만두 시내에는 티베트 불교 사원이 산재한다. 주변에는 티베트 토산품을 파는 이들이나 구걸하는 아이들도 많다. 그러나 이들 못지않게 가난한 네팔인들은 난민들에게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넉넉함을 잃지 않고 있다.

네팔의 상징은 야크(티베트 고원에 사는 솟과의 짐승)와 예티(설인·雪人·눈사람). 고산 등정대의 짐을 지고 5000m가 넘는 험한 준봉을 오르내리는 야크의 강인함. 예티의 신비로운 전설 속에 담겨진 자연에의 외경심. 그 속에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어 네팔인들은 어느 민족 못지않게 높은 자긍심을 갖고 있다.

네팔을 떠나면서 이곳의 권력층이 네팔 민초들의 높은 자긍심과 넉넉한 마음을 절반만큼이라도 따라갔으면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조헌주 도쿄특파원 hansc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