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 문서]日, 사죄-보상 아닌 ‘도의적 양보’ 강조

  • 입력 2005년 8월 2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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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에서 난항을 겪었던 쟁점과 그 내용을 살펴본다. 이들 쟁점에서도 일본은 식민지 지배의 합법성을 강조하며 ‘사죄와 보상’이 아닌 ‘도의적 양보’만을 강조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쟁점은 아직까지도 한일관계에 작지 않은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북한청구권▼

청구권 문제와 관련해 한국 정부는 한일회담 초기부터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로 북한의 청구권 문제도 대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은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북한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한국의 관할권이 한반도 전체에 미친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길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한국의 관할권을 제한함으로써 청구권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다는 포석도 깔려 있었던 것.

양국 간 대립은 1965년 2월 양국 외무장관 회담에서 “1948년 12월 12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결의 195(3)에서 명시된 바와 같이 대한민국 정부가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확인한다”라는 문구를 채택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문화재 반환▼

한국 정부는 문화재 반환 협상에서 일본이 불법적으로 문화재를 반출해 갔다는 의미를 담은 ‘반환’을, 일본은 합법적으로 취득했으나 선의로 돌려준다는 뜻의 ‘증여’라는 용어를 썼다.

이런 시각차로 공전하던 협상은 1965년 6월 7차 회담에서 중립적인 의미의 ‘인도’라는 개념을 채택하고 일부 문화재만을 ‘양국 정부가 합의한 절차에 따라 협정 효력 발생 후 6개월 만에 인도한다’는 선에서 일단락됐다.

이에 따라 한국은 반환 요구 문화재 4479점의 목록을 전달했으나 일본은 ‘국유 문화재는 돌려주지만 사유 문화재는 인도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집해 결국 1431점만 반환했다. 이 때문에 일제 약탈 문화재 반환을 둘러싼 갈등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어업협상▼

1952년 1월 이승만 정권의 평화선 선언(한국 연안의 50∼60마일 수역에 대한 한국 주권 확인)이 한일어업협정의 시발점이었다. 이후의 핵심 쟁점은 전관수역.

한국 측은 40해리를, 일본 측은 12해리를 전관수역으로 주장했다. 양국의 다른 어업 환경 때문이었다. 어업 기술이 일본에 비해 낙후해 인근 연안에서의 어획 활동만이 가능했던 당시 우리 측은 최대의 전관수역 확보가 필요했다. 반면 장거리 어획 활동이 가능했던 일본은 전관수역을 축소하고 공해에서의 자유로운 어업 활동 원칙을 주장했다.

1965년 7차 한일회담에서 우리 측은 전관수역을 12해리로 축소하는 데 합의하는 대신 어업협력 금액으로 일본이 한국에 9000만 달러를 제공하는 내용의 어업협정에 서명했다.

▼간도문제▼

공개된 문건 중에는 “간도지방은 우리 영토”라고 선언한 정부 문서가 있다. ‘대일강화조약에 관한 기본 태도와 법적 근거’라는 제목으로 50여 쪽 분량의 이 문건은 ‘영토 문제’라는 항목 아래 간도 문제를 다뤘다.

이 문건은 1950년 10월 주일 대표부가 작성한 내부 문서로 연합국과 일본의 대일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조약) 체결을 앞두고 전승국 지위를 확보할 경우 일본에 요구할 수 있는 한국의 입장을 정리하고 있다.

문서는 1909년 일본과 청나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은 “불법조약으로 무효를 선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은 전승국 지위를 얻지 못했고 이후 한일회담 중 어떤 교섭에서도 간도 문제는 안건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김정안 기자 credo@donga.com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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