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與 당의장 ‘쓴소리’는 못하나

  • 입력 2005년 8월 2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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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통합과 사회통합, 민족통합이 중요한데 그중에서도 대통령님(김대중 전 대통령·DJ)께서 이뤄 놓으신 남북관계의 계승발전을 통해 민족통합 이루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이 당 지도부와 함께 병원에서 퇴원한 DJ의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을 찾아갔을 때 국정에 대한 생각을 묻는 DJ의 질문에 답한 말이다. 남북관계에 관한 DJ의 의견을 들은 뒤에는 “머릿속이 명쾌해져서 돌아갑니다”라고 말했다.

DJ와 문 의장의 개인적인 관계, DJ의 갑작스러운 입원으로 빚어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갈등을 감안한다면 문 의장의 이 같은 과공(過恭)이 이해가 된다. 자신을 정치에 입문시켜 준 ‘은인’인 데다 입신양명의 길을 터주었고, DJ 정부 시절의 도청 파문으로 열린우리당을 바라보는 DJ와 호남 민심이 심상찮은 상황 아닌가.

이 때문에 그의 발언은 결코 가식이 아닐수도 있지만 그래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거북살스럽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문 의장의 ‘태도’도 상당히 깍듯한 편이다.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있던 2003년 6월 제주도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그는 “역사의 주체세력은 말할 것 없이 대통령”이라며 “충분히 자격을 갖춘 분이 됐는데 요즘 너무 우습게 대통령 귀한 줄 모른다”는 ‘충성 발언’을 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땐 대통령을 직접 모시는 비서실장이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지금은 노 대통령이 당정(黨政) 분리 방침까지 천명한 터라 대통령과 더불어 국정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여당 대표 아닌가.

여당 지도자는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정치의 장(場)에서 이를 실현시키는 역할을 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통령이 민심과 이반된 길을 걸을 땐 과감히 쓴소리를 하는 등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줄도 알아야 한다.

노 대통령의 잦은 연정(聯政) 발언에 지금 다수의 국민이 식상해한다. 25일 밤 KBS ‘국민과의 대화’에서의 발언을 보면 대통령 자신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이젠 여당 내에서조차 “뭐가 뭔지 모르겠다”, “대통령이 당과 괴리돼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문 의장은 ‘당원에게 보내는 편지’와 이런저런 발언을 통해 오직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전파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

문 의장 스스로는 지금 대통령이 걷고 있는 길이 진정 옳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이 지나치게 민심과 괴리돼 있다면 한번쯤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군소리 없이 뜻을 받드는 것만 능사가 아니라 다른 길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걷는 속도를 늦추도록 조언하는 것도 여당 지도자의 역할일 것이다.

해박한 지식에다 동서고금의 고전(古典)을 자유롭게 인용하는 문 의장의 유창한 언변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말과 처신은 지위에 맞게 적절히 하는 게 품격에 어울린다.

문 의장의 말이 많이 들리긴 하지만 여당 지도자의 위상에 걸맞은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는 얘기가 당 안팎에서 들린다. 문 의장은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 근절을 참여정부의 첫 번째 성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여당 대표로서 자신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를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진녕 정치부장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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