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 외교문서 공개]이승만-장면-박정희 3인3색 대응

  • 입력 2005년 8월 2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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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 강경, 장면(張勉) 성급, 박정희(朴正熙) 막후 지휘.’

3만5000여 쪽에 이르는 한일협정 문서 곳곳에는 한일관계를 당시 최고 권력자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이용했는지를 알 수 있는 흔적이 담겨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초강경파였다. 친미파인 그였지만 1956년 주일대표부 김용식 대표에게 보낸 전문에서 “미국이 일본에 옳은 일을 하도록 촉구하지 않는 걸 뻔히 알면서 미국에 중재를 부탁할 수는 없다”고 하기도 했다. 그의 재임 기간 열린 1∼4차 한일회담은 극심한 감정 대립 속에 거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장면 정권은 회담 조기 타결을 서두르는 분위기였다. 제5차 회담 관련 문서에 따르면 당시 한일 양국은 청구권 각 항목에 대해 상당히 깊숙한 논의를 벌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1961년 11월 한일관계 정상화에 적극적이던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일본에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에게 “일본이 성의를 보여주면 법률적인 근거가 있는 청구권만 요구하고 정치적인 배상은 요구하지 않겠다”는 탄력적인 태도를 보였다.

박 의장은 다음해 김종필 특사에게 보낸 훈령에서 ‘평화선 문제에서 양보할 뜻이 있음을 일본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일본이 과거 잘못을 인정한다는 뜻인 청구권 명목이 아니라 독립 축하금이나 경제 원조금 명목으로 3억 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한 데 대해서는 ‘그런 명목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했다. 3억 달러는 그때까지 일본이 제시하던 금액보다 훨씬 많은 돈이었다.

한편 쿠데타로 집권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한일협상과 1963년 대선을 놓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어업전관수역 범위를 당초 40해리에서 일본 측 요구대로 12해리로 축소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한 뒤에도 대선에서 어민 표가 감소할 것을 우려해 대외적으로는 알리지 않았다.

그해 8월 31일 열린 대책회의에서 중앙정보부 국장은 그 사실에 대한 보안 유지를 우려하며 “인격 대 인격으로 신문사에 호소하자”고 제안한다. 이에 외무부 정무국장은 “한국일보는 응해주는 방향이니 동아, 조선, 경향을 우선 설득하겠다”며 언론 통제 시도를 드러냈다.

10여 일 뒤에 열린 9월 11일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대선 전에는 안을 내지 말자고 합의했다. 정보부 국장은 “정권이냐, 한일문제냐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말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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