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O가 된 죄?…주주-소비자들 소송 급증

  • 입력 2005년 8월 2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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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를 집사람 이름으로 해놓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주변에선 이미 명의를 부인이나 자식 이름으로 옮겨놨다는 얘기도 있고…, 친구들도 재산을 빨리 명의이전 하라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샐러리맨으로 출발해 대기업 간부에 오른 K 씨는 요즘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경리부에서 출발해 재무팀에서 오래 근무하면서 회계장부를 오랫동안 관리해 온 그는 이른바 ‘최고재무책임자(CFO)’로 불린다.》

○ 잠 못 이루는 CFO

최근 K 씨와 같은 고민을 하는 기업 CFO들이 적지 않다.

A그룹 재무팀 간부는 “예전에는 경리부장이 회사 돈을 떡 주무르듯이 하는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털어놨다.

그는 “허위 회계장부 때문에 많은 기업인이 검찰에 불려 다니면서 고생했고, 심지어 쓰러진 기업도 있지 않느냐”며 “요즘 회계장부를 정리하다 보면 살얼음판을 걷는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과거처럼 총수의 말 한마디로 비자금을 만들기 어려운 것은 물론 회계 투명성이 높아지면서 문제의 소지를 없애느라 온갖 신경을 쓴다.

B그룹의 한 임원은 “김우중(金宇中) 전 대우그룹 회장 구속처럼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경제사건은 대부분 기업의 비밀 회계장부와 연관돼 있다”면서 “외환위기 이후 경영투명성을 높이는 제도가 잇따라 도입되면서 심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CFO들이 많다”고 전했다.

중견그룹의 한 CFO는 “밑에서 올린 회계장부를 결재하다 보면 손이 떨릴 때도 있다”고 토로했다.

이 임원은 “일부 그룹에서 ‘고해성사’를 해 옛날 회계장부를 가짜로 만든 사실이 드러나고 오너들끼리 경영권을 다투다가 분식한 사실이 들통 나기도 하지만 1차적인 책임은 거짓 회계장부를 만든 CFO에게 돌아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5대 그룹에 속하는 한 대기업 CFO는 “다른 그룹의 과거 분식회계 얘기가 나올 때마다 금융당국에서 ‘그 기업은 고백할 게 없나’고 물어오면 답답할 때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 투명성 높이는 장치가 ‘족쇄’로

CFO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은 재계를 ‘범죄 집단’처럼 보는 사회 일각의 분위기도 영향을 미친다.

물론 1차적인 책임은 회계장부를 거짓으로 만든 기업에 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대기업 간부는 “솔직히 과거에 비자금을 전혀 만들지 않았던 기업이 있겠느냐”면서 “정부와 정치권이 유행처럼 과도한 경영투명성을 요구하는 바람에 오히려 기업할 의욕을 종종 꺾어놓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기업이 주주나 소비자로부터 당하는 소송은 해마다 늘고 있다.

상장회사의 피소(被訴) 건수는 2000년 18건에서 지난해엔 326건으로 급증했다. 소송은 대부분 재무팀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례가 많다는 게 대한상공회의소의 분석이다.

소송이 급증하자 기업들이 임원들에게 가입해 주는 임원배상책임보험 금액도 2000년 309억 원에서 2003년 840억 원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역부족이라는 게 CFO들의 고민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재계 총수가 신임하는 CFO는 권한도 많지만 총수 일가와 함께 운명을 같이해야 할 정도로 부담도 많다”고 말했다.

자산 2조 원 이상 기업이 올해부터 증권집단소송 대상에 들어간 데 이어 최근 정부와 국회에선 공익소송제도와 소비자단체소송제도 및 소비자집단소송제도까지 논의되고 있어 CFO들의 마음을 더욱 짓누르고 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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