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차수]힘없는 국어기본법

  • 입력 2005년 8월 26일 03시 02분


코멘트
요즘 인터넷에는 한글맞춤법을 무시한 글들이 넘쳐나고 있다. 젊은 누리꾼(네티즌)들은 경쟁적으로 새로운 속어나 은어, 약어를 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 ‘엄지족’은 자기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나 기호로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

정부는 언어 파괴와 오염을 막고 국어를 보전 발전시키기 위해 국어기본법을 제정했다. 6개월간의 예고기간을 거쳐 지난달 28일 발효된 국어기본법은 ‘공문서의 한글 전용’ 규정뿐 아니라 우리말을 보전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국가의 의무를 분명히 규정했다.

국어기본법은 문화관광부가 5년마다 국어발전기본계획을 수립해 시행하고 2년마다 그 결과를 국회에 보고하도록 규정했다. 국어정책을 교육 문제가 아니라 민족문화 차원에서 보고 문화부를 주무부서로 선정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또 공공기관의 국어책임관과 국어상담소를 지정할 수 있게 한 것도 주목할 만한 발전이다. 이런 제도들이 뿌리를 내린다면 국어 문제를 다루기 위한 초석이 마련되는 셈이다.

하지만 국어기본법이 시행된 지 한 달이 다 돼 가는데도 변화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국어책임관과 국어상담소에 관한 국어기본법 규정이 의무조항이 아니라 권장사항인 데다 정부의 추진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국어정책 연구 등을 총괄해야 할 국립국어원은 요즘 고민에 빠졌다. 국어기본법 시행으로 일이 많이 늘었지만 예산 지원이나 인력은 여전히 제자리 수준이기 때문이다. 문화부와 협의해 마련한 내년 예산안은 올해와 비슷한 130억 원에 불과하다. 각 자치단체가 경쟁적으로 설립하고 있는 영어마을과 영어학교 예산 수백억 원과 비교하면 국어원의 예산은 낯 뜨거운 수준이다.

게다가 현재의 학예연구직 18명으로는 업무를 제대로 감당하기 어려워 6명을 증원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기획예산처에서 난색을 보이고 있다. 국어기본법에 따른 업무가 권장사항이기 때문에 당장 예산이나 인력을 늘려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어상담소와 국어책임관 도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어원이 이달 말까지 국어상담소 지정 신청서를 접수하고 있지만 아직 한 곳도 신청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올해와 내년의 국어상담소 지원 예산은 각각 2억 원뿐이어서 국어상담소 한 곳에 연간 2000만 원 정도밖에 지원할 수 없는 실정이다. 몇몇 대학에서 문의한 적이 있지만 정부 지원 2000만 원으로는 국어상담소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할 게 뻔하니까 신청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국어책임관 지정 역시 겉돌기는 마찬가지다. 국어기본법에 국어책임관을 둬야 하는 공공기관이 명확히 규정돼 있지 않은 탓인지 국어책임관을 지정한 공공기관이 한 곳도 없다. 게다가 국어 전문가가 아니라 기존 공무원을 국어책임관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돼 있어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언어에는 민족의 얼이 담겨 있고 국어는 문화수준을 반영한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지식재산 확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국어를 먼저 바로 세워야 한다. 일제강점기에도 한글학자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국어를 지켜 냈다. 정부는 국어기본법 제정 취지를 살리기 위한 제도적 지원에 나서야 한다.

김차수 문화부장 kimc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