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윤수]월드컵감독 선임 ‘정치적 고려’ 안된다

  • 입력 2005년 8월 25일 04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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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의 그림자는 이토록 길었단 말인가.

그날의 영광과 신화는 흡사 터널에서 빠져나와 강렬한 햇살을 마주쳤을 때처럼, 그 성취가 너무도 광휘로운 것이어서 지난 3년 동안 한국 축구는 혹시 눈이 먼 것은 아닌가.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은 이윽고 짐을 싸고 만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 홀렸던 것인가. 4강 신화 이후 이른바 ‘히딩크 리더십’을 운운하였으되 그 콘텐츠에 대해 면밀히 살피기보다는 ‘4강 신화의 위대한 쾌거’라는 말에 홀렸던 것이다.

그 ‘위업’이란 거의 긴급조치로 구성된 별동대의 성과였으므로 이를 한국 축구의 내용 있는 결실로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비전과 치밀한 전략적 사고가 필요했다. K리그를 중심으로 각 부문의 허약체질을 개선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그런데 여의치 않았다. 그 성과를 정치적인 열매로 치환하려는 부적절한 노력만 있었을 뿐이다.

이제 10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채 4개월도 남지 않았다. 아무리 한국 대표팀이 ‘감독들의 무덤’이라고 해도 내년에 또 한번 경질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의 과정을 단축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생략할 수는 없듯이 시간이 촉박하다고 해서 중요한 점들을 무시하고 넘어가서는 곤란하다.

우선 축구협회와 기술위원회가 현재의 국면에 대하여 심각한 성찰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반드시 총사퇴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후임 감독을 찾기도 어렵지만 그만큼이나 후임 기술위원을 찾는 것도 어렵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기술위원들은 심각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 실천적 표현으로 후임 감독을 선임하는 절차와 과정을 책임 있게 진행해야 한다. 협회의 수뇌부 혹은 지원 부서에 끌려가서는 곤란하다. 기술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사퇴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막후에서는 다른 채널이 가동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만일 그렇다면 이는 대단히 위험하다. 공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그저 기술위원회만 동네북이 되는 그런 연속극은 아무도 원치 않는다.

그런 점에서 기술위원회는 일체의 정치적 고려를 배척할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는 위기의 한국 축구를 구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일 뿐 협회 회장단의 심기를 고려할 의무는 없다. 해외파 명장을 다각도로 검토하여 선임하는 과정은 물론이려니와 국내 감독을 선임할 경우에도 특히 정치적인 관점은 조금의 판단 기준도 되지 못한다. 몇몇 감독과의 악연은 인지상정의 ‘후일담’으로 미뤄 놔도 좋을 일이다. 지금 유일한 판단 기준은 누가 위기의 한국 축구를 구해 낼 적임자인가 하는 점이다. 협회 바깥의 쓴소리를 경청해 달라는 주문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협회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그 어떤 비판자도 본프레레 감독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협회를 공격하거나, 협회를 흔들기 위해 졸전을 기대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구장의 순진성을 몸으로 체득한 축구인이라면 그런 식의 유치한 정치적 계산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인 의미에서 협회 수뇌부는 정치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 거듭된 경질 파동으로 사분오열된 축구계, 정몽준 회장과 수뇌부는 지금처럼 쓰라린 진통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일거에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번이 한국 축구를 구해 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반대파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특단의 조치와 과감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 푸른 그라운드에서 함께 뛰던 축구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명제가 있지 않던가. “위기는 곧 기회다!”

정윤수 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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