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反문명국가

  • 입력 2005년 8월 25일 03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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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가르기에도 유행이 있다. 지금이야 보수냐 진보냐, 강남에 사느냐 안 사느냐가 기준이지만 중세 말과 근대 초 서양에선 문명인이냐 야만인이냐로 나누는 게 보통이었다. 야만(野蠻)이란 짐승 같은 상태를 뜻했다. 세련된 도시인들은 가축과 섞여 사는 시골사람들을 경멸했다. 하지만 만찬 때는 죽은 짐승, 산 짐승이 식탁 위아래에 즐비했다. “음식 부스러기와 고기 뼈, 기름에다 개와 고양이 배설물까지 범벅돼 역겹다.” 에라스무스가 1526년 테이블 매너에 대해 쓴 책은 신흥 부르주아의 예절 바이블이 됐다.

▷제러미 리프킨은 “식탁이 유럽인들을 문명인으로 만드는 교실이었다”며 이는 개인화와 개인주의, 인권과 연결된다고 했다. 그래도 당시 앞선 문명을 자랑했던 중국 사람들에겐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유럽인은 야만인이다. 그들은 사냥무기 같은 칼로 밥을 먹는다”고 했다. 문명에 대한 기준도 때와 장소,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가.

▷9·11테러 사건 이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세계를 문명국과 반문명국으로 나누고 반문명국에 대한 응징에 전 문명국들이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이슬람세계에서 십자군전쟁이야말로 반문명적으로 보는 것과 딴판이다.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정신적 사회적 발전의 총체를 문명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반문명인지 의견은 모아질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영국 런던 연쇄 폭탄 테러에 대해 “무고한 시민을 대상으로 한 테러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반문명적 범죄 행위”라고 했듯,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해치는 일은 분명 반문명적이다.

▷세계 11위 경제력의 우리나라가 반문명국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 터이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도청 테이프 내용 공개 논란에 관해 “소급입법으로 기본권을 침해하려 한다면 우리 사회는 법이 없는 반문명국가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정파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 해도 ‘당신의 전화 통화 녹음이 만천하에 공개된다면?’을 가정하면 해답은 분명해진다. 당신은 어느 쪽에 설 것인가.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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