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부끄러움 모르는 지상파 방송

  • 입력 2005년 8월 23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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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인 2000년 8월 초.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사 사장들이 갑작스럽게 모여 ‘방송 자정 결의’를 다졌다.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방송의 선정성과 폭력성을 없애는 데 직을 걸겠다”고 하자 방송계가 발칵 뒤집힌 것이다. 박 장관은 당시 ‘왕과 비’(KBS1) ‘뉴스데스크’(MBC) 등 28개의 프로그램을 사례로 제시했다.

5년이 지난 지금은 나아졌는가? 인디밴드 멤버의 알몸 노출이나 며느리가 시어머니 뺨 때리는 장면이 물의를 일으켰고, 드라마의 선정성도 위험 수위를 넘나든다.

방송을 둘러싼 편향성 논란도 그치지 않는다. KBS, MBC는 여전히 ‘친여 매체’ 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지난해 재허가 심사에서 곤욕을 치른 SBS는 ‘자나 깨나 몸조심’이다.

방송위원회의 ‘2004년 시청자 불만 처리 보고서’에 따르면 지상파에 대한 시청자의 불만은 2712건. 이 중 ‘윤리적 수준이 떨어진다’가 443건, ‘공정성 객관성이 훼손됐다’가 284건에 이른다.

지상파의 현주소가 이렇다. 그런데도 한국방송협회(회장 정연주 KBS 사장)는 제작비 증가를 이유로 방송광고제도의 개선을 촉구했다. 문화부가 10월 허용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가상 및 간접광고(프로그램 내 제품 광고)의 도입을 환영한 것이다.

방송협회는 18일 “제작비 상승 때문에 광고제도의 개선이 논의되어야 하며 이는 방송의 공익성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밝혔다. 간접광고로 공익성이 강화된다는 요지이지만 ‘처음 듣는 이론’이다. 지상파 방송사가 돈이 없어 선정성 편향성 논란을 낳았다는 말인가.

지상파 3사는 매년 수백억 원의 흑자를 냈으며 누적 흑자도 수천억 원에 이른다. 1999년 이후 KBS가 1000억 원이 넘는 흑자를 기록한 해도 3번이나 된다. 지난해 KBS는 이례적으로 638억 원의 적자를 냈지만, KBS 경영평가보고서는 “적자가 예상되는데도 일반 기업의 관행과 달리 임금을 4.2% 인상해 213억 원의 추가 부담을 유발한 것은 도덕적 해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연간 수신료 5000억 원을 받는 공영방송사의 이해하기 어려운 경영 철학을 꼬집은 것이다.

간접광고 논란도 해묵은 것이다. 심의규정에서 금지하고 있는데도 특정 제품을 연상시키는 SBS ‘루루공주’ 등 문제의 드라마가 즐비하다. 방송위는 수년 전부터 규제를 외치고 있으나 지상파엔 불통이다.

문화부가 간접광고를 추진하는 이유는 케이블TV 등에 위기의식을 느낀 지상파의 요구 때문이다. 전례에 비춰 보면 지상파 방송사는 조만간 간접광고 허용을 촉구하는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내보낼 것이다. 2001년 초 미디어 렙(방송광고판매대행사) 논란 때 MBC가 자사 입장을 담은 감정적 보도를 잇달아 내보냈던 것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지상파 내부에서 위기감은 팽배해 있다. 그렇다고 다매체 시대에 지상파의 가치에 대한 자성은커녕 비용을 들먹거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런 문제를 외면하고 지상파의 요구에 장단을 맞추는 문화부의 속내도 정략적으로 비친다. 친여 매체에 대한 ‘보답’이자 지방선거(2006년)와 대선(2007년)에 대비한 ‘보험’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허엽 위크엔드 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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