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43>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8월 23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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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노관(盧官)은 유방의 오래된 종놈이라는 걸 나도 안다마는 유고(劉賈)는 또 누구냐? 어떤 놈이기에 감히 과인의 땅으로 기어 들어왔다는 것이냐?”

패왕의 그와 같은 물음을 유고를 아는 장수가 받았다.

“유고는 한왕 유방의 육촌 아우로, 한왕이 파촉(巴蜀) 한중(漢中)을 나올 때부터 장수로 부렸습니다. 특히 새왕(塞王) 사마흔을 칠 때 공이 있었는데, 그 장재(將材)가 만만치 않다는 평판입니다.”

그 말에 패왕은 범이 울부짖듯 소리쳤다.

“유방이 사람을 너무 작게 보는구나. 이놈 저놈 다 장수라고 군사를 떼어주며, 과인의 땅에서 분탕질 치게 하니 더는 참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유방의 머리부터 잘라 그 손발까지 쓸모없게 만들어야겠다. 어서 군사를 재촉해 유방을 잡으러 가자!”

그때 다시 땀에 흠뻑 젖은 유성마(流星馬) 한 필이 성고 성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부연 먼지를 뒤집어쓴 이졸 하나가 뛰어내려 다급하게 알렸다.

“진류성(陳留城)이 팽월에게 떨어졌습니다. 팽월이 1만 군사로 불시에 들이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 패왕은 성난 중에도 멈칫 했다. 성고 동남쪽에 있어 초군(楚軍)들로 보아서는 등 뒤가 되는 진류가 팽월에게 떨어졌다면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걸 모른 척 하고 북쪽으로 올라가 한왕 유방의 진채를 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오래잖아 더 놀라운 소식이 들어왔다.

“어젯밤 외황성(外黃城)이 팽월의 야습으로 떨어졌습니다. 듣기로 팽월은 다시 수양(휴陽)을 노리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수양까지 떨어져 대량(大梁) 인근의 땅이 모두 팽월의 손에 들어간다면 서초(西楚)의 심장부와 성고 사이에는 길이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 만다. 아니, 그 이상으로 패왕이 이끄는 초나라 대군은 동서남북 모두 한왕 유방의 세력에 에워싸인 섬 같은 신세가 된다. 아무리 한왕 유방이 미워도 패왕이 그걸 못 본 체하고 대군을 북쪽으로 몰고 갈 수는 없었다. 생각 끝에 패왕은 종제인 항장(項壯)에게 군사 3만을 나눠 주며 말했다.

“너는 먼저 동쪽으로 가서 유고와 노관이 이끄는 군사를 뒤쫓아 쳐부수어라. 만약 네가 그 두 종놈들을 때려잡아 끊긴 양도(糧道)를 다시 잇고, 다시 남으로 내려가 팽월을 멀리 쫓아버릴 수 있다면 과인은 여기서 바로 유방을 잡으러 갈 수가 있다. 그럼 가서 잘 싸워라.”

그러고는 다시 사람을 용저와 종리매에게 보내 급히 군사를 이끌고 성고에 있는 패왕의 본진으로 돌아오도록 했다. 아직도 한왕 유방 쪽을 노려보고 있는 패왕이라 아무래도 군사를 여기저기 갈라 보낸 것이 마음에 걸린 까닭이었다. 용저와 종리매를 되불러들여 압도적인 군세를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패왕이 항장에게 건 것은 헛된 바람이었다. 씩씩하게 떠날 때와는 달리 항장은 양 땅(梁地)으로 내려간 지 사흘도 안 돼 유성마를 보내 알려왔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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