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문홍]적과 동지

  • 입력 2005년 8월 22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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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해방군과 러시아의 옛 ‘붉은 군대’가 36년 만에 만났다. 1969년 양국 군은 국경에서 두 차례 충돌해 900명의 사망자를 냈다. 하지만 이번엔 총부리가 향하는 방향이 다르다. 지난주 시작된 양국 합동군사훈련의 명목상 적(敵)은 ‘테러’다. 그래서인지 작전명도 ‘평화의 사명 2005’라고 붙였다.

그런데 훈련 내용이 예사롭지 않다. 3단계 훈련 중 2단계는 산둥반도에서의 대규모 상륙훈련, 3단계는 서해상에서의 미사일 발사훈련이다. 방어적 성격보다 공격적 성격이 강하고 테러집단보다는 가상 적국을 겨냥한 냄새가 짙다. 대만이 펄쩍 뛰고, 100년 전 러시아와 싸웠던 일본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누구보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쪽은 미국이다. 훈련 개시 사흘 전 미 국무부는 “(중-러 합동훈련이) 동북아의 현 상황을 해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논평했다. 하루 전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직접 나서 “동북아에서의 이해관계에 비춰볼 때 중국의 군비확장 노력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다음 달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취임 후 첫 워싱턴 방문을 맞게 될 외교 책임자의 말로는 이례적으로 강하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은 진부하게 들린다. 하지만 중-러 합동훈련을 보면서 진부한 말만큼 많은 진리를 담은 경구(警句)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라이스 장관은 그동안 미중 관계에 대해 ‘최상’이라는 표현을 즐겨 써왔다. 하지만 그 ‘최상’에도 이번 훈련과 같은 일로 언제든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물론 이번 훈련 때문에 미중 관계가 당장 나빠지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도, 미국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중국은 얼마 전 미 의회와 경제계의 반중(反中) 여론을 의식해 위안화(貨) 평가절상을 단행했다. 4차 6자회담에서 중국의 활약을 ‘용인’한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미국도 중국과의 갈등을 바라지 않는다.

중-러 밀월관계가 군사동맹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일부의 전망도 근거가 약하기는 마찬가지다. 양국은 이달 초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했고, 그 며칠 뒤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서 “미군은 중앙아시아에서 나가라”고 한목소리로 요구했다. 하지만 두 나라는 기본적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경쟁관계다. 미국의 유일패권 체제에 조금만 틈이 생기면 언제든지 갈라설 수 있는 사이인 셈이다.

적과 동지가 불분명한 세계에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할까. 중-러 합동훈련은 북한 급변사태, 나아가 핵문제 해결 이후 동북아 질서재편에 대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강대국들의 ‘북한 선점(先占) 경쟁’이 시작됐다고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이럴 때 한국이 주도하는 남북통일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한국의 선택은 여지가 없어 보인다. ‘말로만 강소국(强小國)’이 아니라 실질적인 힘을 키우면서 동시에 미국과의 신뢰를 더욱 다져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노무현 정권의 낮은 경제성적표를 볼 때 한국이 ‘작지만 강한 나라’로 발돋움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다. 한승주 전 주미대사는 최근 “한미관계가 실무적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대미관계의 최고위 리더십은 기대할 수 없는 상태가 돼 버렸나.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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