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서령/낡고 작은집이 더 좋다

  • 입력 2005년 8월 19일 03시 05분


코멘트
영화 ‘닥터 지바고’를 본 건 겨울이었다. 스무 살이었다. 극장을 나와 도청 앞까지 가는 버스를 탔는데 희한하게 그 버스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우리 집까지 달렸다. 터져 나갈 것 같은 가슴을 기사가 아는 줄 알았다. 스산한 금속음을 내며 위험하게 덜컹거리던 27번 버스, 정류장을 무시하고 맹렬하게 달리던 그 버스가 아니었다면 닥터 지바고가 그토록 강렬했을 리 없다(나중에 생각해 보니 차에 이상이 있어 정비소 방향으로 달리던 중이었던 것 같다). 극장을 나온 지 며칠이 지나도 나는 모스크바의 추위 속에 지바고와 함께 있었고 버스의 덜컹거림도 여전히 귓전에 쟁쟁했다.

그러면서 뇌리엔 영화 속 두 개의 소품이 각인되었다. 열쇠와 책상! 라라가 대문 앞 낡은 기둥에서 벽돌 한 장을 빼내고 꺼내 들던 열쇠와 추운 밤 손가락 끝마디가 나온 장갑을 끼고 라라에게 편지를 쓰던 지바고의 서랍 많은 책상, 그 둘이 내 삶의 잊지 못할 이미지가 됐다.

어쩌다 집 구경을 꽤 하며 살았다. 주인의 세계관이 집안에 어떻게 반영됐나를 은근히 살피다 보니 집의 공기를 느낄 줄 알게 됐다. 그 기준이 바로 열쇠와 책상이라는 걸 알고 스스로 놀랐다.

아무리 좁거나 낡아도 열쇠와 책상을 가진 집은 좋은 집이었다. 열쇠는 가족간의 은밀하고 따스한 유대이고 책상은 갈등과 화해와 소통의 역사일 것이다. 그게 쌓인 집은 설령 한 귀퉁이가 삭아 내린다 해도 향훈이 감돌았다. 첫 아기가 태어난 집, 부모님이 사시던 집, 젊은 부부가 첫 꿈을 함께 꾸던 집은 그 추억만으로 집에 품격이 얹혔다. 그런 집은 쉽사리 팔아 치울 수가 없다. 어쩌다 피치 못해 이사를 갈 일이 생기면 집을 두고 가기 싫어 온 가족이 눈물을 떨어뜨린다.

그러고 보니 이사 가면서 우는 사람이 있단 말을 요즘 통 들어 보지 못했다. 집과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면 사람과도 사랑을 주고받기 어려울 게 뻔하다. 아이들의 커 가는 키를 기록한 문짝, 걸음마를 배울 때 부딪쳐 넘어지던 기둥, 이빨 자국이 남은 계단 참, 그런 게 남아 있는 집이 귀한 집이다. 보물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집도 가족의 역사가 새겨지면 보물의 되어 금전 가치를 뛰어넘는다. 사람들이 제각기 고작 평당 몇 천만 원씩으로 계산되는 재산이 아니라 평당 수억 원을 줘도 못 파는 보물을 가졌으면 좋겠다. 남의 보물은 내 보물과 다르니 그토록 소모적으로 서로 키를 잴 필요도 없으리라.

어느 피자 배달 소년이 하던 말을 오래도록 잊지 않는다. “현관에 들어서면 그 집안 특유의 냄새가 나요. 화목한 집은 따뜻한 냄새가 도는데 하도 좋아서 한참씩 서서 그 냄새를 맡아요. 그런데 그런 집이 생각만큼 흔치를 않아요.”

강남 아파트 서른 평이 얼마 얼마라는 소문이 무성하고 공간이 돈이란 것쯤 이제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게 나쁠 건 없지만 문제는 그 공간을 얻기 위해 우리가 평생을 허덕거려야 한다는 점이다. 몇 년을 허덕거려 한 평을 불리고 다시 몇 년을 일해 두 평을 불린다? 그렇게 불려 놓은 공간에 정작 들어앉을 시간도 없이 바쁘기만 한데도? 이제 집은 쓸모나 안락보다 넓어 보이는 게 더 절실한 미덕이 돼 버렸다. 같은 평수로 더 넓어 보이는 걸 궁리하는 안목치수라는 것도 생겨났다.

무조건 넓기만 하면 다 좋은가? 좁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의 살갗을 비비댈 때가 혹 더 살만하진 않았나? 아무리 넓어도 훈김 돌지 않고 썰렁하면 무슨 소용? 내가 아는 집에 관한 비밀이 하나 있다. 면적이 좁을수록 덥히기가 쉽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도 물리법칙과 같다. 집을 키우려고 밤늦도록 일하는 대신 식구들이 다리를 펴고 앉아 ‘이 거리 저 거리 각거리’를 하며 노는 게 더 잘사는 법 아닌가. 소유의 경제학에서 존재의 형이상학으로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다. 자그마한 열쇠와 조붓한 책상으로 얼마든지 충만할 수 있다.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닥터 지바고’를 볼 수 있는 세상인데 무얼 더 바라랴.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