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39>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8월 18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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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왕 유방이 대군을 이끌고 동쪽에서 하수(河水)를 건넜다 합니다. 지금 소수무(小修武) 남쪽에서 오창(敖倉)을 향해 오고 있는데 그 기세가 여간 아니라는 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패왕이 분노를 실소로 바꾸어 허허거리며 말했다.

“그 장돌뱅이 놈이 무슨 요술이라도 부린단 말이냐? 한 놈은 서쪽에서 종리매와 용저를 막고 있고, 또 한 놈은 동쪽에서 대군을 몰고 온다니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냐?”

“한왕은 애초부터 서쪽으로 달아난 게 아니라 동쪽 한신에게로 가서 그 대군을 거둬들였습니다. 거기다가 며칠 전에는 관중에서 적지 않은 군사가 다시 한왕에게 이르렀다 합니다.”

멀리 척후를 나갔던 군사가 그곳 백성들에게서 들은 대로 전해 주었다.

“그 소리야말로 장량이나 진평이 과인을 이곳에 묶어 놓기 위해 퍼뜨린 헛소문일 것이다.”

패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렇게 소리쳤으나 군사를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다시 한번 사람을 동쪽으로 보내 그 말이 맞는지를 알아보게 했다. 하지만 패왕이 들은 소문은 사실이었다.

그때 한왕 유방은 정말로 하수를 건너 소수무 남쪽에다 진채를 벌여 놓고 있었다. 한신의 군사를 거두어들이자 삽시간에 불어난 한군은 소하가 한왕 유방의 사촌 형 유고(劉賈)에게 관중에서 긁어모은 군사 3만을 보내면서 더욱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에 힘이 솟은 한왕은 패왕과 다시 한번 맞붙어 보려고 형양 성고 쪽으로 군사를 몰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한왕의 투지는 장해도 그 하려는 바는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유고가 이끌고 온 관중의 군사들 때문에 머릿수로는 패왕이 거느린 초나라 군사와 비슷해졌지만 그 질은 아직 초나라 군사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싸움에 져본 적이 별로 없는 초군은 여전히 강동의 정병(精兵)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데 비해, 한군은 대개가 여기저기서 새로 긁어모은 데다 조련도 제대로 안 된 잡군(雜軍)이었다. 또 장수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패왕 밑에서 단련된 초나라 장수들을 당해낼 만한 맹장이 한왕 곁에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거기다가 한왕을 더욱 위태롭게 하는 것은 쓸 만한 책사(策士)들이 모두 멀리 나가 있다는 점이었다. 막빈으로는 겨우 역이기 정도가 있었으나, 역이기는 유생(儒生)이고 유세가(遊說家)였다. 아무리 그 재주를 크게 봐주어도 싸움터에서 장량이나 진평의 빈자리를 메워줄 만한 책사는 결코 못 되었다. 그런데 한 사람 알려지지 않은 책사가 있어 한왕을 그 무모한 싸움에서 건져냈다.

한왕 곁에서 시중드는 낭중(郎中) 가운데 정충(鄭忠)이란 사람이 있었다. 정충은 평소 헤아림이 깊고 충직하여 한왕을 편하게 모셨으나 말이 없어 그 재주는 별로 드러난 바 없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한왕을 찾아보고 조심스레 말했다.

“신(臣)이 삼가 대왕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봐 주시겠습니까?”

“그대가 어쩐 일인가? 말하라. 과인이 귀담아들으리라.”

워낙 말이 없던 사람이라 한왕이 그렇게 받았다. 정충이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대왕의 처지는 석 달 전 형양성을 빠져나가 관중으로 들어가셨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대처하시는 모습은 어찌 이리도 그때와 다른지 실로 알 수 없습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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