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용관]박철언 회고록, 자기반성이 빠졌다

  • 입력 2005년 8월 1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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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언(朴哲彦) 전 의원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5공, 6공, 3김 시대의 정치비사’(1, 2권)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일단 한 시대의 기록으로서 나름의 ‘가치’는 있다는 느낌이다. 시간 장소 등장인물 대화내용 등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놀라울 정도다.

예컨대 “1989년 5월 18일 저녁 9시 30분, 서울 상도동 D아파트 ○동 ○○호에서 김영삼 총재(YS)와 만났다. 이 집은 김 총재의 차남 현철 씨의 집이다. YS는 커피를 타 주며 ‘나는 김대중하고 결별하니 3당 간에 합의를 추진…’라고 했다”(1권 407쪽)는 식이다.

본보가 3회에 걸쳐 그의 회고록을 요약 게재한 것도 그런 기술이 일정 부분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회고록은 권력자들끼리의 은밀한 대화와 적나라한 상호 비난, 정적(政敵)이 연관된 뒷거래까지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 정사(正史)에서 맛볼 수 없는 긴박감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책에는 이런 ‘장점’ 못지않게 결점도 많다. 무엇보다 공정함과 솔직함이 결여돼 있다.

회고록은 기본적으로 주관적 서술일 수밖에 없다지만 최소한의 자기반성과 고뇌가 담겨야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자신이 정의를 실현하려 노력했다는 내용뿐이다. 권위주의 정권의 실세였던 자신의 굴곡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자기반성이 없는 회고록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돼 있다.

또 자신과 악연이 있는 인사를 ‘나쁜 사람’으로 기록하는 등 편향성도 심해 기록의 객관성을 훼손하고 있다.

저자는 사자(死者)의 치부까지 실명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가령 자신이 면접을 본 한 대법원장 후보가 자신에게 “영광이다”라고 말했다는 식이다.

선진국에선 길게는 십수년 동안 철저한 고증을 거쳐 회고록을 낸다고 한다. 특히 반론을 할 수 없는 사자에 관한 내용은 공식 문서를 토대로 엄정하게 기술해 명예훼손이 없도록 하는 게 기본이다.

그런 엄정함은 아니어도 최소한 형식상의 균형이라도 갖췄으면 어땠을까. 박 전 의원의 회고록에서는 그런 균형감을 찾아볼 수 없어 뒷맛이 씁쓸했다.

정용관 정치부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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