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서지문]나라의 품격도 묻어버린 장례

  • 입력 2005년 8월 1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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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리라고 불러 주십시오.” 이구(李玖) 씨가 처음 귀국했을 때 인터뷰하러 간 기자가 적당한 호칭을 못 찾아 머뭇거리자 이구 씨가 했다는 말이다. 단지 황실의 핏줄을 이어받았다고 해서 처음 밟는 고국에서 황세손 대접을 받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겠지만, 평범한 ‘미스터 리’로 살고 싶었던 그의 소망도 담겼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황실의 마지막 황세손에게 오늘날도 국민적 차원에서 공식 예우를 할 의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애처로운 영혼을 따뜻하게 보내는 것은 나라의 품격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비극을 운명으로 타고났던 사람이 어찌 이구 씨뿐일까만 이구 씨만큼 출생부터 저주받은 인생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불공대천의 원수인 한일의 황세제와 공주의 강제 결혼의 산물인 기구한 운명의 소년은,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고 그의 가족에 대한 일본 왕실의 연금과 함께 간섭과 지배가 끊겼을 때 그의 명석한 두뇌로 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장학금을 얻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운명의 올가미를 잠시 벗을 수 있게 된다.

방자 여사가 열아홉 살 외아들을 천만리 이국땅으로 보내기를 주저할 때 영친왕은 “구는 아버지를 딛고 넘어 넓은 세계로 가라. 나처럼 되지 말고 마음껏 너의 길을 찾아라”라고 하면서 애지중지하는 아들을 떠나보냈다고 한다. 일생 운명의 밧줄에 겹겹이 묶여 살았던 아버지가 염원한 아들의 자유로운 삶은 이구 씨가 매사추세츠공대(MIT)를 고학으로 졸업하고 뉴욕의 I M 페이 건축사무소에 취직함으로써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영친왕 부처는 그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미(渡美)하고 그 후에도 다시 뉴욕과, 이구 씨가 하와이대의 동서문화센터를 설계하느라 머물렀던 하와이를 방문해 아들 부부와 함께 지내면서 꿈같은, 황홀한 행복을 맛본다.

그러나 영친왕의 죽음을 앞둔 귀국으로 이구 씨도 조국에 이주하게 되면서 그는 운명의 그물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영친왕이 그토록 애절하게 아들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방자 여사가 남편의 나라에 친정의 죄를 속죄하고 한국 사람으로 죽기 위해 영친왕 사후(死後)에도 그토록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구 씨는 ‘황세손’이라는 실체 없는 허울을 벗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번에 그의 장례에 정부 측 사절로 참여한 문화재청장이 이 황실의 마지막 관(棺)을 몰수(달리 무엇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하고 이구 씨의 시신을 상업용 관에 넣어서 매장하도록 했다니 너무도 비정한 일이 아닌가? 그 관의 고고학적 연구 가치가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으나 정부 측의 애도를 전하고 협력을 제공해야 할 공동장례위원장이 망자에게서 관을 박탈했다는 것은 내게는 권력의 월권(越權)으로 비친다. 래커 칠을 한 누르스름한 상업용 관이 하관되는 사진을 보면서 참여정부의 역사의식을 보는 것 같아서 참담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이구 씨는 한국에서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이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황손의 대표로서 황실 후예의 권익을 위해 일하라는 친족의 여망도 괴로웠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기에는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전혀 없었고, 떨쳐 버리기에는 조상의 피가 그를 놓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불행한 삶과 최후를 위로할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친족들의 강요에 의해 이혼당했다고 알려진 그의 전 부인 줄리아 여사는 서양 여성답지 않게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고, 이혼을 당한 후에도 시어머니를 도와 심신장애아를 돌보며 그들의 재활을 도왔고, 오늘날까지도 한국에 정착하려고 무진 애를 써 왔다. 그런데도 ‘유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례식에 초대받지 못하고 길 건너에서 먼눈으로 이구 씨의 영구에 작별인사를 했다 한다. 현재 82세인 줄리아 여사가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우리나라에서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해 준다면 이구 씨의 처량한 영혼이 크게 위로를 받을 것 같다.

서지문 객원논설위원·고려대 교수·영문학 jimoon@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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