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5년 장준하씨 사망

  • 입력 2005년 8월 1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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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14m, 경사 75도의 가파른 절벽. 경기 포천시 약사봉의 등산로 아래에 그는 누워 있었다. 핏자국이나 상처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해방 전에는 광복군으로, 해방 후에는 언론과 정치인으로 나라만을 걱정하던 장준하(張俊河) 씨는 어처구니없는 등반사고로 너무나 허무하게 일생을 끝막았다.’ 다음날인 1975년 8월 18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는 이와 같은 말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장준하. 일본군에 학병으로 징집됐다 탈출해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에 합류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비서로 활동한 그는 광복 후에는 교양지 ‘사상계’를 창간해 독재정권에 항거했다. 1967년 정계에 입문, 신민당 국회의원에 당선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최일선에서 공격했다.

그가 숨진 시점은 미묘하기 그지없다. 유신 정권에 맞서 ‘개헌 청원 100만 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돼 1974년 12월 풀려난 그는 1975년 8월 20일부터 2차로 ‘민주회복을 위한 100만 인 개헌 서명운동’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1보가 나간 다음날인 19일자에서 동아일보는 사회면 톱기사로 장 씨의 죽음에 얽힌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장준하 씨 사인에 의문점’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경사 70도의 벼랑을 왜 장비도 없이 내려오려 했을까 △등산 코스를 따라갔다가 왜 절벽을 택해 혼자 내려오려 했을까 △목격자가 왜 사고 후 장 씨의 시계를 차고 있었을까 등 세 가지 의문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기사를 편집한 기자는 긴급조치 9호 위반 죄로 구속됐고, 침묵이 강요된 가운데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그 후 29년이 흐른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장 씨 사망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 불능’ 판정을 내렸다. 사건 초기 자료 등이 확보되지 않아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당시 경찰관으로 현장에 처음 도착했던 이수기(59) 씨는 최근 언론과의 회견에서 “추락사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려웠다”고 술회했다. 물이 흘러 이끼가 낀 절벽을 굴러 떨어졌다는 사람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해 보였다는 것. 목격자로 알려진 인물이 지서에 신고를 한 일도 없었다고 이 씨는 덧붙였다. 장준하 씨가 비명에 간 지 30년이 지난 오늘 현재까지도 진상은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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