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60주년]패전의 기억 지우고 “강한 일본 앞으로”

  • 입력 2005년 8월 1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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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타자동차는 일본 제조업의 자존심과도 같은 기업이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일본의 여론지도층 인사 1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49%가 전후 60년을 상징하는 일본 기업으로 이 회사를 꼽았다. 이런 도요타도 반세기 전 존망의 위기를 겪은 적이 있다. 도요타 사사(社史)는 1950년 초 발생한 장기 파업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50일간의 파업으로 전체 근로자의 25%인 1500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임원 전원이 물러났었다. 그해 6월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도요타가 기사회생하는 발판이 됐다. 미군은 ‘어제의 적’ 일본을 군수장비 조달 기지로 활용했다. 태평양전쟁 중 무기생산에 동원됐던 대기업들은 공장 한쪽에서 뒹굴던 기계를 손질해 달러를 벌어들였다. 일본의 경제 전문가들은 “패전으로 엉망이 된 일본 경제가 단기간에 성장 궤도로 진입한 데는 6·25전쟁 특수(特需)가 결정적인 변수가 됐다”고 말한다. 이처럼 패전의 폐허를 딛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거듭난 일본의 전후사는 바다 건너 한반도와의 끈질긴 인연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 폐허에서 경제대국으로

전승국인 미국과 패전국인 일본은 현재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45%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의 GDP는 2004년 기준 4조6234억 달러로 미국에 이어 2위이고, 1인당 국민소득(GNI)은 9위(3만7180달러)다. 외환보유액은 6월 말 현재 8393억 달러로 부동의 세계 1위다.

일본은 6·25전쟁에서 챙긴 현금을 종자돈 삼아 1950년대 개별 기업이 경제 재건을 이끄는 ‘기업의 시대’로 줄달음쳤다. 항복 선언을 한 지 불과 10년 만인 1956년 일본 정부는 경제백서를 통해 “이제 더는 전후(戰後)가 아니다”고 대내외에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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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주도의 경제 운용, 기업과 은행의 유착에 가까운 자금공급 체계, 종신고용제 및 회사에 대한 충성 요구 등 일본 경제를 특징짓는 틀도 이 시기에 갖춰졌다. 일본의 경제성장 경험은 한국, 대만 등 후발 인접국들의 행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1960년대와 돈 버는 재미에 빠진 1970년대, 일본에 역사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과거사에 대한 부정과 외부 지향의 충동은 1990년대 초 거품경제 붕괴와 함께 찾아왔다.

○ 젊은 세대의 역사 불감증

현재 일본 인구의 70% 이상은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이른바 전후세대다. 10, 20대의 젊은 층에 전쟁은 부모 세대의 회고담에서만 존재할 뿐 현실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위대한 일본의 재현’이라는 콘셉트는 상업문화 제작자들의 좋은 소재가 되고 있다. 원자폭탄 피폭지인 히로시마(廣島)에서는 올 4월 문을 연 ‘야마토(大和) 박물관’이 인기다. 8일 50만 명째 입장객을 맞이한 이 박물관 매점에서는 야마토 과자, 야마토 젤리가 불티나게 팔린다. 1945년 4월 ‘전함 야마토’가 옛 일본군 병력 3000여 명과 함께 동중국해에 수장된 역사는 이미 잊혀진 과거일 뿐이다.

극장가에서는 가상적국의 음모에 맞서 자위대 요원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다룬 전쟁영화 ‘망국의 이지스함’이 젊은 관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신사도 대중 매체 보도로 유명해지면서 호기심 많은 일본인들에게 가족 동반 나들이 터로 변질됐다.

마이니치신문의 여론조사에서 일본의 전쟁 도발이 ‘잘못’이었다고 대답한 30∼60대는 43∼46%였다. 그 반면 20대는 36%로 가장 낮았다. ‘잘 모른다’(34%) ‘어쩔 수 없었던 전쟁’(29%)이라는 응답도 다른 세대보다 많았다.

○ 일본 어디로 가는가

도쿄 외교 소식통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우경화를 주도한 인물로 비판받지만 자민당에서 차세대 주자로 거론되는 면면을 보면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자민당 간사장대리,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경제산업상 등은 ‘강한 일본’ ‘할 말은 하는 일본’을 내세우며 “일본이 더는 과거 역사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앞세대에서 벌어진 전쟁의 책임을 당시 태어나지도 않은 지금의 젊은 세대에 묻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이들은 “일본도 다른 나라와 똑같은 ‘보통국가’가 돼야 한다”며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재무장과 자위대의 군비 확충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북한과 중국의 잠재적 위협을 이유로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미사일방어(MD) 체제를 도입하기로 했고,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 등을 통해 자위대의 활동 범위를 해외로 넓히는 데 성공했다. “누가 일본 총리가 되든 8월 15일엔 반드시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해야 한다”는 이들에게 전범은 ‘나라를 위해 애쓰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선조’일 뿐이다.

자민당이 자위대의 자위군(軍) 격상, 해외에서의 무력행사 허용, 전수(專守·수비에 전념하는 개념) 방위 원칙의 포기를 골자로 한 헌법개정안 초안을 확정한 것도 이들의 입김이 작용했기에 가능했다. 방위청의 성(省) 승격과 국방 의무 조항의 신설 등도 계속 추진하고 있다. 자민당 내 일부 우익 사이에서는 핵 무장론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일본 정계가 우경화로 치달으면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반성한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담화’의 정신은 퇴색했다. 중의원 결의안과 고이즈미 총리의 전후 60주년 담화가 무라야마 담화보다 후퇴한 것은 일본의 역사인식이 지난 10년간 뒷걸음질쳤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인접국의 걱정 섞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일본이 걸어갈 60년은 과거 60년과 확연히 다를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도쿄=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위안부… 강제징용… 영토분쟁… ‘60년 묵은 빚’▼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흘렀지만 일본은 여전히 전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은 한국과의 사이에 △옛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근로자 △사할린 잔류 한인 문제 등 여러 현안을 안고 있다. 러시아와의 북방영토 분쟁, 중국과의 센카쿠(尖閣) 열도 마찰도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후유증이다.

마이니치신문은 “일본 정부는 법적으로 해결이 끝났다는 입장이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의 국민감정을 엇나가게 만드는 대표적인 현안이다. 일본 정부는 1965년의 청구권 협상으로 개인 배상 문제가 종결됐다는 입장이지만 이런 자세는 일본 내에서도 ‘지나치게 시야가 좁은 대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종전 당시 일본 내에만 200만 명이 넘었던 조선인 강제징용 근로자에 대한 배상 문제도 과제 중 하나다. 당시 이들을 고용했던 기업들은 체불임금 보상에 소극적이고 일본 법원도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있다.

옛 일본군이 중국 곳곳에 남긴 화학무기 처리 문제도 일본이 짊어진 대표적인 ‘부(負)의 유산’으로 지목된다. 당시 일본군이 제조한 독가스는 약 750만 발로 이 중 상당수가 중국 동북부 지방 등에 방치돼 왔다. 2003년에도 43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패전 당시 중국 만주 러시아 등에서 살다가 귀환하지 못한 ‘잔류 일본인’들은 본국 정부를 상대로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당시 57만여 명이 소련 당국에 억류돼 강제노동에 투입됐고 이 중 47만여 명만이 귀환했다. 나머지 중 5만5000여 명은 숨졌고 4만7000여 명은 러시아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일본 정부에 생계 대책 등을 요구하고 있다.

도쿄=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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