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장강명]어느 국정원직원의 좌절

  • 입력 2005년 8월 15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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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국가정보원에 다니는 30대 초반의 친구를 만났다. 그는 기업에 다니다 그만두고 몇 년 전 국정원에 들어갔다. 지원 이유는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국가안전기획부와 국정원의 불법 감청(도청) 사건이 화제에 올랐다. 우선 그는 자신의 조직에 일종의 배신감을 느낀다고 했다.

“휴대전화 감청이 된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 조직의 간부들은 직원들에게까지 휴대전화 감청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조직이 직원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아예 그 부분에 대해 말을 하지 말든지, 말을 하려면 제대로 얘기해 주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고도 했다. “우리 사무실의 젊은 직원 중에는 박사 출신도 많다. 그들 모두 밤을 새워도 군말하지 않고 일한다. 보수가 많은 것도, 업적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자존심과 일종의 자기최면으로 일한다.”

그런데도 도청의 오명을 안게 됐으니 한숨이 나온다는 얘기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이 얼마나 애국심이 충만한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동기생들끼리 지원 이유를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지원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국제범죄와 맞서고 싶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모두 애국심이 가득 차 있었다. ‘죽을지도 모르지만 적지에 가라’는 지시를 받았어도 다들 기꺼이 응했을 거다.”

그는 지금 정체성의 위기를 느낀다고 했다. 국정원 직원으로서의 애국심이 묻혀 버릴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다.

그는 “과거에 잘못한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모든 걸 다 공개하라고 하고 또 지금처럼 몰매를 가한다면 누가 밤을 새워 일하고 싶겠는가. 우리의 본연의 임무는 음지에 있는 것인데 여론을 보면 아예 우리더러 양지로 나오라는 것 같아 혼란을 느낀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은 국익의 손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뒤틀린 현대사 때문인지 아직도 정보기관이라는 말은 어쩐지 음험하게 들린다. 그러나 세계 각국이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는 시대에 비밀정보활동 없이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가 있을까. 나라를 위해 국정원에 들어갔다고 자부하는 젊은 인재의 좌절이 안타깝기만 했다.

강강명 정치부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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