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휴대전화 도청’ 본보기사에 국정원 적반하장 대응

  • 입력 2005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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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가 2002년 10월 25일 ‘국가정보원의 휴대전화 도청’ 사실을 보도한 데 대해 당시 국가정보원이 즉각 민·형사소송을 제기한 것은 국정원 최고위층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12일 알려졌다.

국정원의 한 고위 관계자는 최근 “관련 기록을 검토해 본 결과 쓸데없는 소송으로 판단돼 항소를 취하하도록 지시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다른 고위 관계자도 “2002년 당시 국정원 최고위층이 과학보안국 간부들에게 동아일보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내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시 국정원에는 신건(辛建) 원장을 정점으로 국내담당에는 이수일(李秀一) 2차장, 장종수(張悰洙) 기획조정실장 등이 지휘라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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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은 보도가 나간 당일 곽동한 씨 등 5명 명의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본보 기자와 관련 간부들을 검찰에 고발하는 한편 11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함께 냈다.

국정원 측은 “도청을 하지 않기 때문에 도청 장비가 있을 리 없다”면서 “통신·기술업무를 담당하는 직원 5명이 개인적으로 소송을 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본보는 국정원이 5일 발표를 통해 김대중(金大中) 정부 당시의 휴대전화 도청 사실을 시인할 때까지 2년 9개월여 동안 지루한 법적 공방에 시달려야 했다.

먼저 형사 절차가 시작됐다. 기자는 2003년 6월과 7월 검찰에 두 차례 소환돼 12시간과 10시간씩 장시간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수사검사는 기자에게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기자는 그 후에도 검찰 관계자들로부터 “정정보도를 내주면 (국정원이) 소를 취하하겠다고 한다. 합의가 안 되면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듣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는 올해 4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된 본보 기자들에 대해 무혐의(일부는 죄 안 됨) 결정을 내렸다. 서울민사지법 제26민사부도 6월 국정원 측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국정원 측은 검찰의 무혐의 결정 때 도청 사실에 관해서는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 또 민사재판에서 패소한 뒤인 7월 6일 이에 불복해 항소까지 했다.

그러다가 최근 X파일 사건이 불거지면서 궁지에 몰린 뒤에야 비로소 국정원 측은 휴대전화 도청 사실을 고백하듯 시인하기에 이르렀다.

국정원에 따르면 △1996년 이탈리아에서 휴대전화 감청 장비 4세트를 수입해 아날로그 휴대전화를 도청했고 △국가안보 관련 통신첩보를 수집할 목적으로 유선중계통신망 6세트를 제작해 1998년 5월부터 디지털 (CDMA 방식) 휴대전화의 도청에도 일부 사용했으며 △차량에 탑재하는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 장비 20세트도 1999년 12월 개발해 2000년 9월까지 도청에 사용하다 각각 2002년 3월 폐기했다.

국정원은 신 원장이 2002년 3월 이 장비들을 폐기하도록 지시하고 이후에는 도청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도청 장비는 신 원장이 국정원 2차장으로 재직 중(1998년 3월∼99년 6월)에 제작돼 사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국정원 수뇌부는 최소한 2002년 3월 이전에는 휴대전화 도청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국정원이 본보를 상대로 민·형사소송을 강행한 것은 휴대전화 도청 사실을 은폐하고 다른 언론의 후속 보도를 막으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김대중 정부 때의 권력 핵심 인사 등이 국정원의 발표에 대해 음모설을 제기하는 것은 ‘물타기’의 성격이 짙다. 당시 김 전 대통령과 관련 장관들이 “도청이 없었다”고 거듭 주장해 왔다는 점에서 음모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국정원의 ‘도청 고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다. 2002년 3월 이후에는 과연 국정원의 발표대로 도청을 하지 않았는지가 주요 의혹 중 하나이다.

검찰은 올해 4월 본보 관련 수사를 종결하면서 “국정원이 불법 감청을 하고 있다거나 휴대전화 감청 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지 않았다”며 참여연대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 신 전 원장 등에 대해서도 무혐의를 내렸다.

신 전 원장은 그동안 국회 등에서 “국정원이 도청을 했다면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도청설이 근거가 없다면 도청설을 주장한 사람도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역공을 펴기도 했다.

물론 본보 보도와 국정원 발표를 비교하면 도청 장비의 수(본보 보도 50개-국정원 발표 20개)나 제조한 곳(미국-국내) 등 일부 다른 내용도 있다.

그러나 본보는 당시 신뢰할 만한 국정원 관계자로부터 제보를 받아 경찰 및 보안업체 관계자 등의 확인 취재를 거쳐 휴대전화 도청 사실을 폭로했으며 이번 국정원 발표로 기사의 주요 부분은 사실로 확인됐다.

최영훈 기자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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