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죽어가는 나치가 용서를 구한다면…‘해바라기’

  • 입력 2005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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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내려 집단수용소로 향하고 있는 유대인 행렬. ‘나치의 짐승’들에 의해 89명이나 되는 일가친척을 잃었던 시몬 비젠탈은 묻는다. 여기 죽어가는 나치가 용서를 구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진 제공 뜨인돌
기차에서 내려 집단수용소로 향하고 있는 유대인 행렬. ‘나치의 짐승’들에 의해 89명이나 되는 일가친척을 잃었던 시몬 비젠탈은 묻는다. 여기 죽어가는 나치가 용서를 구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진 제공 뜨인돌

◇해바라기/시몬 비젠탈 지음·박중서 옮김/327쪽·1만 원·뜨인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가던 무렵, 나치의 집단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대인 시몬 비젠탈은 나치 친위대원인 카를의 병상 앞으로 불려 간다.

카를은 심한 부상으로 죽음의 고통 속에 놓여 있었다. 그는 난생처음 보는 비젠탈에게 과거 자신이 유대인을 학살했던 범죄를 낱낱이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의 손을 부여잡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다. “저는 마음 편히 죽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발….”

최대 규모의 유대인 학살이 자행됐던 폴란드 비르케나우 제2수용소 입구. 사진 제공 뜨인돌

비젠탈은 순간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를 동정할 것인가. 심판할 것인가. 병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비젠탈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여기 죽어 가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의 마지막 소원조차 들어주지 못했다!”

나치의 짐승들에게 89명이나 되는 일가친척을 잃고 아내와 단둘이 살아남았던 저자. 종전 후 유대역사기록센터를 설립해 1100명의 나치 범죄자를 색출했던 저자는 카를과의 만남, 그 ‘특별한 경험’을 들려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야기한 강력한 도덕적 질문을 던진다.

죽어 가는 나치가 용서를 구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책의 2부에는 전 세계 저명인사들이 저자의 이 같은 질문에 답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들은 끝까지 침묵을 지킴으로써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았던 저자의 행동에 대해 그 도덕적 함의를 진지하게 따져 묻는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더라도 카를은 그런 고백을 했을까? 그는 죽어 가면서 나치의 신조를 포기했는가, 끝까지 나치로 남았는가? 그리고 누가 그를 용서한단 말인가. 누가 그런 권한을 주었는가?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프랑스로 망명했던 홍세화 씨는 자신을 고문한 이근안을 용서한다는 김근태 씨의 경우를 빗대 ‘너그러운 마음’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묻는다.

“김근태 씨는 고문피해자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피해자들로부터 대표성을 부여받은 적이 없다. 그의 용서는 세상에 공표되지 않고 마음속에 남아 있었어야 했다.”

저자와 함께 집단수용소에 있었던 동료 역시 이렇게 말한다. “자네는 오직 자네가 당한 일에 대해서만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거야.”

그렇다면 카를은 누구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 그가 잘못을 저지른 대상은 아무도 살아있지 않은데.

독일 출신의 철학자 허버트 마르쿠제의 생각은 단호하다. “가해자가 희생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정의에 대한 모욕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네케이마 테크는 만약 비젠탈이 카를을 용서했다면, 그는 평생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자른다. “그런 행동은 수백만 명의 다른 희생자에 대한 배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살아남은 언론인 디트 프란은 “나는 그를 용서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함정에 빠진 상태였다. 그는 완전히 세뇌당했던 것이다. 우리는 진짜 죄인과 그 졸개를, 악랄한 지도자와 하수인을 구분해야 한다.”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어느 티베트인 승려의 이야기 역시 여운을 남긴다.

18년 동안 중국의 감옥에 수감돼 있던 승려에게 “감옥에 있으면서 가장 큰 걱정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뜻밖에도 이렇게 답하는 것이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오직 한 가지, 중국인들에 대한 동정심을 잃게 되지 않을까, 그것만을 걱정했습니다….”

원제 ‘The Sunflower’(2005년).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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