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주년 기획]할머니와 어머니와 딸들의 이야기

  • 입력 2005년 8월 12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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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는 남성만의 기록인가. 그래서 광복 60년의 역사 속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주류 역사에 끼지 못한다고 여성들의 삶은 없는 것일까.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가만히 귀 기울여 보자.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 우리 딸들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광복과 전쟁, 독재

“전날 미군 비행기가 서울 하늘을 뒤덮었다고 해요. 어머니는 15일 새벽에 저를 낳으셨고 낮 12시 일왕의 패전 선언 후 아버지가 그대로 퇴근해 돌아오셨답니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서 태어난 박미영 씨는 15일 환갑을 맞는 해방둥이다.

박 씨는 1·4후퇴 때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는데 미끄러지지 말라고 어른들이 신발에 새끼를 꽁꽁 감아줬던 것이 어제 일 같다고 회상했다.

또 다른 해방둥이 박화수 씨는 세종로 사거리에 있던 여고 1학년 때 4·19혁명을 맞았다. “밖에서 총소리가 나자 선생님께서 책상 밑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그날 박 씨는 중앙청 쪽이 막혀 성북구 돈암동 집으로 가지 못하고 용산구 후암동 친구 집에서 같은 반 아이들과 함께 잠을 잤다.

여중 3학년이었던 또 다른 해방둥이 김현옥 씨도 배구선수 기숙사에서 놀다가 길이 막혀 그날 밤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해방둥이들은 20대에 유신독재를 체험했다. 김 씨는 “밤이면 통금을 알리던 사이렌 소리가 생생하다”고 회상한다.

# 살림 밑천과 공순이

서울 동작구 대방동 여성사전시관. 검색 코너에서는 ‘폐쇄된 기차역에 가마니를 깔고 만든 국민학교에 다녔다’는 빈농의 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겨울에는 장작을 이고 등교를 해야 했고 할아버지는 ‘여자가 공부해서 뭐 하냐’며 못마땅해 하셨다.’

강원 양양군 강현초등학교에 다녔다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 전향란(全香蘭·58) 씨는 “배움에 목마르던 시절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쓰리다”고 회고했다.

6남매 중 살림 밑천이었던 첫딸은 20리 길을 걸어 집에 와서 저녁밥을 짓고 코흘리개 동생들을 업어서 키워야 했다. 농번기에는 새참을 실어 나르느라 밭에서 살다시피 했다.

11일 추도식이 열린 ‘YH사건’의 주인공 김경숙(당시 21세) 씨를 회고하는 코너도 있다.

‘경숙이는 엄마가 시골에서 고물 행상을 하셨고, 봉제공장에서는 하루 몇 백 원어치 풀빵으로 끼니를 때웠대요. 가발을 만드는 YH무역이 좋은 공장이라며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했는데….’

집안의 대들보인 어린 남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공장으로 향하는 것은 우리네 딸들의 숙명이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졸음, 배고픔과 싸워가며 가발을 만들고, 재봉틀질을 하던 ‘공순이’들은 고도성장이라는 미명과 함께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이제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다. 하지만 1970년대 ‘공순이’를 대표하던 여성노동자 최순영(崔順永·53) 씨는 2004년 당당히 국회의원이 됐다.

# 여성 1호 vs 어머니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은 임영신(任永信)이었다. 대한민국 여성의 역사는 ‘여성 최초’의 역사였다.

이화여고 출신의 김현옥 씨는 김활란(金活蘭)과 박순천(朴順天)을 대표적 여성 인물로 꼽는다. 이화여대 총장과 이사장을 지낸 김활란은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여성. 박순천은 최초의 여성 당수다.

동아일보가 여성 포털사이트 미즈에 의뢰해 1∼9일 전국여성 418명을 대상으로 ‘알고 있거나 관심 있는 광복 이후 여성인물 21’을 조사한 결과 강금실(康錦實) 전 법무부 장관이 1위(9.9%)를 차지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삼순(김선아 분), 성교육 강사 구성애,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가 그 뒤를 이었고 김활란은 5위에 머물렀다. 박순천은 겨우 17위, 임영신은 19위였다.

여성 대법관, 여성 헌법재판관, 여성 장성, 여성 전투기조종사…. 금녀의 벽을 깨뜨렸다는 여성의 이야기는 더 이상 뉴스가 되지 않을 날이 머지않았다. 금년도 외무고시 합격자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다. 여성 비율을 늘리기 위해 할당제를 시행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

마지막 성역이라는 여성 대통령? 가능하다는 의견도 많아졌다.

“5년 전만 해도 보수당의 여성 대표를 꿈꿀 수 있었겠어요? 이젠 여성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인물이 그만한 역량을 갖췄느냐의 문제이지요.”(지은희·池銀姬 전 여성부 장관)

여성들은 2005년 광복 이후 철옹성 같았던 호주제를 폐지해 ‘남녀평등의 마지막 걸림돌’까지 제거했다. ‘딸들의 반란’을 성공시켜 종중원의 자격도 얻어냈다.

이번 조사에서 21명 외에 가수 이미자,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골프선수 박세리, 성악가 조수미, 가수 보아와 함께 ‘우리 엄마’가 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잖아요”라는 설명과 함께.

그렇다. 1호 여성의 뒤에는 엄마가 있었지. 밥하고 빨래하고 애들 키우며 ‘보잘것없고 궂은일’만 도맡아 하는 엄마다. 복부인과 치맛바람의 원조이기도 했지만 딸들만은 자기처럼 살지 말라고, 이 악물고 공부시켰다.

지금의 엄마들은? 자녀들의 ‘로드매니저’로 퇴화한 엄마들도 있지만 엄마가 물려준 살림솜씨를 이웃과 나누는 ‘사회주부’가 된 이들도 많다.

# 딸들의 딸들

정부가 초등학교에 이어 중학교에서도 남녀 모두 가정과 기술을 배우도록 한 1995년,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가 세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겠다며 ‘윈도95’를 출시했다.

그해에 태어난 서울 역삼초등학교 4학년 박은엽(10) 양은 “미국에 있는 오빠들과 인터넷으로 자주 채팅한다”고 말한다.

인터넷 안에서 남녀의 구별은 없다. 그래서 이들은 “여자들은 똑똑하고 침착하고 끈기가 있어요. 남자들은 장난이 심할 뿐이죠”(윤소현·대치초교 4학년)라고 말한다.

반장선거에서 여자아이들이 휩쓸자 아예 남자반장 여자반장 따로 뽑고 있다.

요즘 딸들은 남녀차별에서 자유롭다. “둘이 싸우면 대부분 오빠가 혼나요.”(하서연·대치초교 4년)

꿈도 원대하다. 현모양처? 그런 꿈은 이제 없다.

“연예인이 되고 싶어요.”(조윤미·아주초교 4년)

이들 ‘디지털 키즈’는 광복 100주년인 2045년 꼭 50세가 된다. 이들 시대의 여성 위인은 누굴까.

여성사전시관이 최근 독산초등학교 6학년생과 개웅중 특활반원들에게 꼽도록 한 결과 ‘통일을 이룬 여자 대통령’이 등장할 것이란 응답이 많았다.

이 밖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수학을 만든 수학 박사, 세계 최초로 살아있는 공룡을 발견한 고대유적 발굴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한 여성협회 회장 등이 꼽혔다.

딸들에게도 신나는 시대는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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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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