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김창균/‘길을 먹어치우는 자벌레’

  • 입력 2005년 8월 11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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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벌레는 자신이 깃들여야 할 집과 길들을

하루 종일 먹고 있다.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그 푸른 집들. 길들.

벌레의 입 속에서 집과 길이 소화되고 있는 동안

나는 가끔씩 출렁거린다.

간신히 몸을 기울여

푸른 뽕나무 기둥까지 걸어가 본다.

그 나무 등피에 나를 세워 놓고

내 몸에서 숨쉬는

머언 먼 조상의 말들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자벌레가 온몸을 다 재고 내려가면

사람이 죽는다는 으스스한 말씀들

내 몸이 벌레의 길이 되는 그 순간들.

하루 종일 자신의 집과 길을 먹어 치운 자벌레가

남아 있는 자신의 푸른 집 위에 똥을 싼다.

까맣다.

집이었다가 밥이었다가 길인 뽕나무들이 어두워지고

달맞이꽃들 야윈 손 들어 얼굴을 가린다.

순간 달이 일렁인다.

-시집 ‘녹슨 지붕에 앉아 빗소리를 듣는다’(세계사) 중에서》

인간은 우리가 깃들어야 할 집과 길들을 하루 종일 먹고 있다.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그 푸른 집들. 길들. 인간의 입 속에서 집과 길이 소화되고 있는 동안, 나 자벌레의 허리가 무시로 출렁거린다. 인간이 숲의 몸을 다 재고 나면 숲이 사라진다는 으스스한 예언을 떠올려본다.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스팔트를 재고 또 재는 것은, 오직 자벌레가 한 뼘 두 뼘 측량한 영토만이 숲으로 되살아난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아픈 별의 측량이 다 끝나기 전에는 오랜 꿈인 우화(羽化)의 길도 접어둘 것이다. 어쩌면 살아서 불리지 못할 내 이름은, 별박이자나방.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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