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감청리스트 오르면 빠지는 경우 거의 없어”

  • 입력 2005년 8월 8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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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안심할 수 있습니까”국가정보원의 휴대전화 도청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들 사이에서도 도·감청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의 한 매장 앞에 도청감지기 및 몰래카메라 장비에 대한 판매광고가 붙어 있다. 안철민 기자
“당신은 안심할 수 있습니까”
국가정보원의 휴대전화 도청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들 사이에서도 도·감청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의 한 매장 앞에 도청감지기 및 몰래카메라 장비에 대한 판매광고가 붙어 있다. 안철민 기자
2002년 3월 이후 불법 감청(도청)이 근절됐다는 국가정보원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도청에 대한 의혹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전 국정원 과학보안국장 A 씨가 사실상의 도청인 편법감청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증언했고, 정치권에서도 관련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편법 감청 ‘현재진행형’=A 씨 증언의 요지는 “국정원이 감청이 종료된 사람에게 종료 사실을 통보하지 않아 계속 감청 대상자로 남아 있다”는 것.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운동권 출신인 정치권 인사 B 씨는 최근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C 씨를 만났다. 국정원이 이 사실을 파악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B 씨까지 감청 대상에 올려 영장을 받고 감청을 한다.

그러나 수사 결과 B 씨는 혐의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당연히 국정원에서는 통신비밀보호법 규정대로 B 씨를 감청 대상 명단에서 제외시킨 뒤 감청 사실과 집행 기간 등을 서면으로 30일 이내에 본인에게 통보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를 통보해 주지 않고, 이후에도 감청 기간을 연장하거나 영장을 재신청해 ‘합법적인’ 감청을 계속한다.

A 씨는 “어떤 정보기관이 ‘당신이 간첩 혐의가 있어 감청했는데 아무 것도 없더라. 미안하게 됐다’고 통보해 주겠느냐”고 말했다.

현행법상 감청 기간은 1회 4개월까지이며, 한 차례 연장을 거쳐 최대 8개월까지 가능하다. 전시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아니면 더 이상의 연장은 불가능하며, 감청을 계속하려면 영장 신청을 다시 해야 한다.

하지만 “영장 신청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A 씨의 증언대로라면 국정원 직원들이 얼마든지 합법을 가장한 도청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국정원이 실제로 모든 감청 장비를 폐기했는지에 대해서도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40) 씨는 “과학보안국이 없어진 2002년 10월까지 도청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 씨는 2002년 9월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 의원이 같은 해 5월에 통화한 내역을 공개한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한나라당이 공개한 문건은 도청 내용이 아니다”면서 “2002년 3월 이후 도청을 완전히 중단했지만 과학보안국을 유지하면 시비가 계속 이어질 것을 우려해 과학보안국까지 해체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2003년 봄까지 휴대전화 도·감청’=한나라당 권영세(權寧世) 전략기획위원장은 7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국정원이 최소한 2003년 봄까지 (차량 등에 탑재해) 휴대전화를 도·감청하는 장비를 사용했다는 제보를 수없이 받았다”고 주장했다.

권 위원장은 또 “2002년 3월 도·감청을 모두 중단했다는 국정원의 주장은 결국 노무현(盧武鉉) 정권과 도청의 연관성을 차단하기 위한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같은 당 김형오(金炯旿) 의원도 이날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2002년 3월은 당시 여당인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 구도조차 불분명한 시기로 오히려 (정보기관에서 정보 수집을 위해 휴대전화 등에 대한) 도청에 가장 의존할 시기”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또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휴대전화 도청이 안 된다는 국정원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 민간 보안업체 관계자는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2003년 해외의 한 유명 감청 장비 개발 회사 관계자가 ‘한국 정보당국의 견해와 달리 부호분할다중접속(CDMA)방식 휴대전화 도·감청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한국에서 시연해 보일 수 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고 주장했다.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폐기시점 왜 2002년3월▼

왜 하필 그 시점일까. 그리고 당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군사정권부터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시절까지 수십 년 동안 불법 감청(도청)을 해 온 국가정보원이 2002년 3월부터 도청을 중단했다고 발표하자 그 배경과 이유를 놓고 갖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전 국정원 과학보안국장 A 씨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통신비밀보호법의 개정이다. 국정원이 감청 장비를 폐기했다고 밝힌 2002년 3월은 공교롭게도 2001년 12월 29일 신설된 통비법 제10조 2항 ‘국가기관 감청 설비의 신고’ 조항이 시행된 시점과 맞아떨어진다.

이 조항은 정보기관이 감청 설비를 새로 도입할 경우 6개월마다 설비의 종류와 명칭, 수량, 감청 능력 등을 상세히 국회 정보통신위원회에 신고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

신설 장비뿐만 아니라 기존 장비도 신설조항이 시행된 시점으로부터 3개월 이내에 모두 신고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등에 도청 관련 정보가 줄줄이 새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국정원은 김대중 정부 시절 도청과 관련해 한나라당의 공세에 끊임없이 시달려 왔는데 대통령선거를 불과 10개월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감청 장비에 관한 정보가 야당에 그대로 제공될 경우 후유증은 불을 보듯 뻔하다.

자칫 대선에서 정권을 야당에 넘겨줄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야당 측에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기존 장비를 없애는 길을 선택했다는 게 A 씨의 설명이다.

A 씨는 “당시 신건(辛建) 국정원장이 ‘정권이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데 만약 우리가 (국회에) 보고하지 않으면 나중에 책임을 져야 한다’며 폐기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둘째, 통비법이 아니더라도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 직원들의 정보 유출이 노골적으로 이루어지던 시점이어서 보안 유지를 위해 장비를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1997년 대선 때도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각 후보 측에 정보를 제공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A 씨는 “특정지역 출신 직원들이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 의원 측에 줄을 댔고, 보안사항이 직원들에 의해 새나갔다”며 “관리가 안 돼 더 이상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개정된 통비법이 시행된 2002년 3월부터 공소시효가 7년으로 늘어나 국정원이 ‘꼬리 자르기’ 차원에서 시점을 선택했다는 지적도 있다. 감청 장비를 그 이전에 보유하면 공소시효가 5년이지만 이후에는 최대 7년까지 통비법 적용을 받기 때문.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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