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국가기관 도청 ‘독수(毒樹)의 뿌리’를 뽑자

  • 입력 2005년 8월 6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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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김대중 정부 때도 4년간 불법 감청(도청)을 조직적으로 자행했음을 고백했다.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둘러댔던 휴대전화 도청 사실도 결국 시인했다. 독재정권 시절 고문과 도청의 최대 피해자였다며 국가안전기획부를 국정원으로 바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공언했던 김대중 정권의 이중성(二重性)이 여실히 드러났다. 민주 정부의 탈을 쓰고 국민을 철저히 기만한 것이며, ‘욕하면서 배운다’는 정치권력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의심하고 불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국민들은 김대중 정부 말기까지 도청이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은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 장비까지 자체 개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장비를 차량에 싣고 도청 대상자가 있는 곳에 접근해 도청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당국자들은 그동안 “국민의 정부는 국민의 사생활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며 의문을 제기한 쪽에 오히려 정치공세니, 음해니 하며 화살을 돌렸다. 가증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본보가 2002년 국정원의 휴대전화 도청 사실을 보도하자 ‘터무니없는 허위보도’라며 국정원 직원들의 이름으로 수억 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올해 6월 10일 법원이 1심에서 ‘보도의 위법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리자 국정원 측은 지난달 6일 이에 불복해 항소까지 했다. 진실을 철저하게 덮으려는 몸부림이었겠지만,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국정원이 김영삼 정부 때의 도청 테이프가 유출된 사건을 계기로 역대 정권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국가범죄 사실을 이제라도 스스로 밝힌 것은 일단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국민의 분노와 의심을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여전히 많다.

우선 도청한 결과물들이 어떻게 처리됐는가 하는 점이다. 국정원은 PC 파일로 보관해 오다 모두 폐기했다고 하지만 1997년 도청 테이프도 녹취록과 함께 나도는 마당에 그 이후의 것들이 다 없어졌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PC 파일은 복사와 전달이 손쉽다는 점에서도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만에 하나라도 이를 정략적(政略的)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범죄의 재활용’이라는 이중의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점에서 청와대의 뜻과는 달리 테이프 내용은 수사하지 않기로 한 검찰의 결정은 법치를 세우기 위한 옳은 선택이다.

국정원은 2002년 3월 이후 국가기관의 도청은 근절됐다고 하지만 이도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법원의 영장을 받은 감청이 급증했다. 그동안 정부에 수없이 속아온 국민의 입장에선 합법을 내세운 편법 도청 사례가 전혀 없다고 믿기 어려운 실정이다. 감청 업무를 해 온 다른 정보기관들은 어떻게 변했는지도 궁금하다.

도청의 실체에 대한 국민의 의혹을 완전히 해소하는 일은 검찰의 몫이다. 김승규 국정원장도 검찰의 조사나 압수수색을 받을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주저할 이유가 없다. 국정원의 말대로 정말 도청이 사라졌는지, 명명백백한 증거를 제시해 국민을 안심시켜야 한다. 도청 범죄를 저지른 관련자들을 엄벌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통신비밀 보호를 규정한 헌법과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길이다.

진상규명과 처벌이 검찰의 일이라면 국정원법 개정 등 제도개선은 국회의 몫이다. 여야(與野) 가릴 것 없이 이번에야말로 도청이라는 독수(毒樹)의 뿌리를 뽑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를 뒷전으로 미룬 채 드러난 도청 사실과 내용을 정략적으로만 이용하려 든다면 이는 법치(法治)와 인권에 대한 중대한 도발이다. 국회는 먼저 도청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위증(僞證)을 한 역대 국정원장과 정보통신부 장관부터 검찰에 고발해야 한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도 ‘불법이 낳은 독과(毒果)’인 도청 내용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도청 파문을 이용해 정치판을 다시 짜려 한다는 말까지 흘러나오는 상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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