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충식]8월에 생각하는 ‘미국 이기기’

  • 입력 2005년 8월 3일 03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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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8월은 울고 웃는, 희비(喜悲)의 계절이다.’ 일본의 아쿠타가와(芥川)문학상을 받은 작가 이회성 씨의 표현이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국치(國恥)의 날이 8월 29일. 1945년의 광복의 기쁨, 비극적인 남북 분단도 8월이다.

망국과 분단에는 미국도 개재돼 있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가쓰라-태프트 협정으로 미국이 방조한 탓도 있다. 60년 전의 38도선은 미국이 그어 소련에 분할을 제의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지금 분단의 후유증이라고 할, 베이징의 6자회담에서 미국이 주도적인 카드를 쥐고 있다.

일본도 미국에 2번이나 굴욕적으로 당했다. 첫 번째가 1853년 페리 제독에 의해서였다. 페리는 군함 4척을 이끌고 우라가(浦賀) 만에 나타나 함포를 들이대며 개항과 통상을 강요했다. 낡은 막부정권은 버티려 했으나 결국 무서워서 손들고 말았다. 조약이 맺어졌다. 미국 함선에 연료와 물자를 대준다, 시모다(下田) 하코다테(函館) 두 곳을 개항한다, 미국에 무역 특혜를 보장한다 등등. 말만의 ‘화친(和親)조약’이었다.

처절한 굴복의 현장, 우라가 만이 바라보이는 구리하마(久里濱) 항구에 지금 페리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관광용 팸플릿에는 ‘페리가 끌고 온 흑선(黑船)으로, 태평하게 잠자던 일본은 근대국가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다. 페리는 미국의 국익을 실천했을 뿐인데도 일본의 은인이 되어 있다.

구리하마 해변 길은 잘 다듬어져 아름답다. 도쿄에서 열차로 한 시간 거리인 ‘페리 거리’는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이 멋진 해안도로와 해안 축대 건설에 한반도 백성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재일 문필가 김달수(작고) 씨의 글에 1930년대 이곳에서 피땀을 쏟은 비참한 노동자들의 삶이 나온다.

페리에게서 제국주의를 배운 일본, 그 ‘일본 제국’의 먹이가 된 한반도, 망국의 백성들이 ‘페리 거리’ 터를 닦은 것이다.

일본의 또 한번의 굴욕은 진주만을 기습하며 감행한 대미(對美)전쟁의 패배였다. 한 번도 정복당하지 않았다는 땅 일본에 1945년 맥아더 사령관이 이끄는 미군이 진주했다. 맥아더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神)으로 여겨지던 일왕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둘이서 사진을 찍을 때 일왕은 정장 모닝코트를 입어도, 정복자 맥아더는 평상복 차림 그대로다. 일왕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알리는 포즈였다. 맥아더는 그렇게 5년여를 군림했다. 일제의 조선총독보다 지독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더 막강한 지배자였다.

그런 맥아더가 일본에서 위인(偉人) 반열에 올라 있다. ‘일본을 만든 12명’이라는 책 가운데도 당당히 맥아더가 꼽힌다. 12명 중에 일왕은 단 한 명도 없는데, 맥아더가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적 국수주의와 자존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맥아더가 일본을 너무 크게 바꾸어 놓았으므로 그 현실, 그 역사 자체를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를 둘러싸고 진보와 보수가 대치 상태다. 나는 동상 자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믿는다. 다만 극동군사령관 자격으로 하지 중장(서울 주둔)을 지휘했던 맥아더, 그리고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수복의 계기를 만든 맥아더, 그의 궤적을 동상 하나 무너뜨린다고 해서 지울 수는 없다. 그리고 동상을 없애는 것만이 극미(克美) 승미(勝美)의 길이라고 우기는 것 자체가 우매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국의 국익을 관철하려는 미국이 동상 하나로 좌우될 리 없다. 감정론을 누르고, 미국과 우리의 국익을 함께 추구할 방도를 찾는 냉철하고 현실적인 용미(用美)가 필요한 때다.

김충식 논설위원 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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