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테이프 274개]불법도청 대상-장소-내용 검찰밝힐까

  • 입력 2005년 8월 1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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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수사관 공운영씨 조사검찰 수사관들이 31일 경기 성남시 분당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인 전 국가안전기획부 미림팀장 공운영 씨를 조사한 뒤 돌아가고 있다. 전영한 기자
검찰 수사관 공운영씨 조사
검찰 수사관들이 31일 경기 성남시 분당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인 전 국가안전기획부 미림팀장 공운영 씨를 조사한 뒤 돌아가고 있다. 전영한 기자
《‘어떤 사람들이, 어디에서,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까.’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도청 테이프와 관련해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합법적으로’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김종빈(金鍾彬) 검찰총장이 “보고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알고 싶지 않다”고 한 것이다. 》

▽총장의 ‘출사표(出師表)’=통신비밀보호법 제16조 1항은 도청 내용을 공개하거나 누설한 자는 엄하게 처벌하도록 규정했다. 법정형이 10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하의 자격정지다. ‘벌금형’도 없다.

안기부 도청조직 미림팀장이었던 공운영(58) 씨 집에서 압수한 도청 테이프 274개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공 씨 수사를 위해선 불가피하다. 도청행위 하나하나가 별도의 범죄(법률용어로 ‘실체적 경합’)이므로 수사 검사는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도청했는지 밝혀야 한다.

수사 검사는 수사 내용을 지휘 간부에게 보고한다. 그 지휘의 정점에 총장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다르다. 통비법 조항에 따라 ‘보고’도 ‘공개’와 ‘누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고민하는 검찰총장
김종빈 검찰총장이 5월 10일 대전고검 초도순시에 나섰을 때 직원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고 의견을 들은 뒤 잠시 눈을 감고 있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하지만 형법 제29조는 ‘업무로 인한 행위’를 ‘정당행위’로 보고 처벌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위법성 조각 사유’다. ‘수사 내용 보고’도 이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총장은 보고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방침은 앞으로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나도 알려는 것을 포기할 테니 어느 누구도 알려고 하지 마라’는 메시지다. 이 선언을 총장의 ‘출사표’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청 테이프의 대화내용이 아닌 다른 것, 예컨대 도청 대상자의 신분과 도청 횟수 등 도청 수사에 관련된 사항은 보고를 받으며 수사를 지휘할 것으로 보인다.

▽“대화 내용 공개는 절대 불가”=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안기부의 도청 대상이 된 ‘유력 인사’들의 대화 내용.

그러나 총장이 “나도 보고받지 않겠다”고 한 마당에 검찰 스스로 내용을 외부에 공개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물론 검사의 실수와 언론의 비밀 취재 등으로 일부 내용이 알려질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다.

▽도청 대상자 공개는=불법 도청의 대상이 어떤 사람들인지 공개하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형사소송법은 ‘공소사실의 기재는 범죄의 일시, 장소와 방법을 명시해서 사실을 특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검찰은 1993년 국가보안법상 국가기밀누설 혐의로 소설가 황석영 씨를 기소하면서 공소장에 황 씨가 누설한 ‘국가기밀’의 내용까지 적시했다.

따라서 기소 단계에서 범죄 내용을 특정하기 위해 도청 대상자를 공개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월 △△일 OO호텔 식당에서 A와 B가 나눈 내용을 불법 도청하고…’라는 식으로 공소장에 기재하는 것이다. 검찰도 벌써부터 이 문제에 대해 고민 중이다.

그러나 검찰 내부에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한 검찰 간부는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의 신원을 밝히는 것은 또 다른 피해를 주는 것”이라며 “이 사건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 말했다. 판례도 ‘부득이한 경우에는 공소 내용이 특정되지 않더라도 위법하다고 할 수 없다’며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은밀한 대화 장소는 알려질 수도=장소가 대화의 ‘내용’은 아니므로 ‘어디에서’는 공개될 가능성도 있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서는 안 되지만 이 상자의 출처를 공개하는 것은 무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주로 이용하는 곳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이번 기회에 알려질 가능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어디에서,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까’ 하는 세간의 호기심 중 ‘어디에서’는 밝혀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알려질 가능성은 높지 않고,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까’는 아주 희박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누설’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검찰도 ‘사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도라의 상자가 ‘영원히’ ‘완벽하게’ 닫혀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황진영 기자 buddy@donga.com

▼뒤숭숭한 정치권▼

《지난 주말 영남의 한나라당 초선 A 의원은 지역구 행사 도중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급히 상경했다. 지인으로부터 ‘X파일’에 대한 중대한 제보가 있다는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어보니 확인이 사실상 불가능한 소문 수준이었다. 그래도 당 지도부는 A 의원에게 “계속 지인과 접촉하라”고 지시했다. 검찰이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미림팀장이었던 공운영 씨에게서 확보한 불법 도청 테이프 274개의 존재 때문에 정치권이 술렁이고 있다. 특히 테이프 내용의 공개 여부가 관심의 핵심이다. 홍석현(洪錫炫) 주미대사의 중도 하차로까지 이어진 ‘X파일’의 파장에 비춰 볼 때 274개 테이프의 파괴력은 ‘핵폭탄급’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술렁이는 정치권=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검찰이 테이프 내용을 공개할지와, 공개할 경우 그 수위를 파악하는 데 모든 정보망을 집중하고 있다.

여당의 한 정보통 의원은 “검찰에서 지난 주말 대강의 내용은 열람한 듯하다”며 “검찰의 한 관계자가 ‘한마디로 두려운 내용’이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여당 일각에서는 검찰이 확보한 테이프 중에 혹시 김대중(金大中) 정부 이후에 제작된 것이 있는지를 파악하려는 움직임도 분주하다.

한나라당은 지난 주말부터 권영세(權寧世) 전략기획위원장을 중심으로 ‘X파일 대책팀’을 가동했다. 한 관계자는 “1일 국회 정보위원회의 국정원 보고를 들은 뒤 활동 방향 등을 조정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여야의 신경이 온통 불법 도청 테이프에 쏠려 있다 보니 일각에서는 미확인 정보도 돌고 있다.

열린우리당 이은영(李銀榮) 제1정책조정위원장은 31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테이프에) 정치인들의 여자 문제와 간통사건, 또는 (정치적으로) 양다리를 걸쳤다거나 기업 등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내용 등이 들어있지 않겠느냐”며 “두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공개론 vs 불가론=정치권에서는 불법 도청 테이프의 공개 문제와 관련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노동당을 제외하고 여야의 공식 입장은 공개 불가 쪽이다.

열린우리당 전병헌(田炳憲) 대변인은 “테이프 공개 여부에 정치권이 관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한나라당 임태희(任太熙) 원내수석부대표는 “테이프 변조 가능성이 있다. 검찰 조사 후 폐기 처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한나라당에서는 검찰이 확보한 테이프 274개가 공 씨가 미림팀장으로 일하던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 제작됐을 가능성이 큰 만큼 ‘공개 불가론’이 압도적이다.

열린우리당도 전신인 민주당 등이 개입될 수 있는 만큼 섣불리 공개론을 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여당 내 일부 재야파는 “이번 기회에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을 부각시켜야 한다”며 공개를 주장한다.

장영달(張永達) 상임중앙위원은 “국민적 의혹 해소 차원에서 법적 시효 여부를 떠나 테이프 내용의 진상을 국민 앞에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여야 중진이 공개에 반대하는 것에 비해 공개를 주장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초선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초선 의원 대부분이 불법 도청 테이프가 만들어질 때는 정치권에 몸담지 않았다는 점이 ‘자신감’의 배경인 듯하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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